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덕이 Sep 20. 2024

느슨하게 채식하기

페스코와 비건 그 어딘가

날라리 채식 생활 6년 차인 내게 채식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어렵다.

우선, 채식을 왜 하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어렵고(이미 여기서 평가적인 멘트를 들을 확률이 높다)

언제부터 채식을 했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어렵고(지금도 6년 차란 윗 문장을 작성하기 위해 햇수를 헤아려야 했다)

어떤 채식 유형이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어렵고(현존하는 유형 중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는 채식의 거창한 장단점을 논하는 것이 어렵다.

이렇게 답변하기 어려운 까닭은 내가 날라리 채식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가장 대답하기 쉬운 두 번째 질문인 '언제부터 채식을 했는가'로 시작해 보자.

2019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여 뭔가 새로운 책을 찾다가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을 접하게 되었다.

위고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아무튼>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에세이라는 형식을 택했지만 내용은 묵직한 한 방이 있는 책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미 몇 권을 성공적으로 읽었던 참이었다. '아무튼, 비건'도 제목은 거부감이 있지만 윤리적인 책임감에 못 이겨 시작한 책이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한 '연결됨'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채식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책.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채식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다양한 트렌드 잡식성인 내게 미니멀리즘, 파이어족, 프리랜서 등과 같은 유행 중인 트렌드를 알아보고 관련 지식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또 좋아하는 일이었다. 채식은 한 번쯤은 알아봐고 싶으면서도 도저히 내키지 않아 꽤 오랫동안 외면했던 분야였다. 대학생 이후인 2010~2020년은 지금만큼 채식이 대중적이지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채식을 시작했다고 하니 엄마가 이상한 종교에 빠진 것이 아닌지 걱정했을 정도니 말이다(그 당시에는 엄마한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며 어이없어했지만 나중에 남자친구까지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하니 어른들에게는 채식이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게 되었다...).


약 10년 정도 미룬 채식에 대한 부담감은 '아무튼, 비건'을 읽고 한 방에 해결되었다. 채식이 부담스러웠던 데는 한평생 야채를 거의 먹지 않고 고기만 먹는 식습관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까 봐였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놀랍게도 전혀 고기가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담감 없이, 손쉽게 가장 난도가 높다는 비건식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건식을 시도한 첫 몇 달간 가장 고무적이었던 변화는 몸무게가 5kg 정도 빠졌다는 것이다. 엄격한 비건식을 먹고 있었기에 간식, 치킨, 햄버거, 튀김, 생선류 등을 모두 먹지 않고 나물반찬 위주로 식사한 결과였다. 살이 급격하게 빠져서 엄마의 걱정이 커져 건강검진을 진행했고 다행히 모든 결과가 정상이었다. 살아있는, 그리고 살아있었던 음식은 먹지 않는 비건식을 실천하며 미각과 후각 모두 예민해져 고기 냄새도 맡기 힘들었다.


여기까지 오면 세 번째 질문인 어떤 채식 유형인지에 대한 질문이 왜 어려운지 의아할 수 있다. 간단하게는 현재 내가 비건식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유형이 달라졌는지, 왜 달라졌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절대 먹고 싶지 않던 바다생물이 언제부턴가 찔리지만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 같고 집에서 먹을 때는 비건식이어도 괜찮지만 사회생활이나 친구들을 만날 때 엄격한 채식을 유지하는 것이 힘든 게 그 이유일 것 같다. 누군가가 지금의 내게 어떤 채식 유형이냐고 묻는다면 대외적인 답변은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먹을 땐 페스코(수산물, 유제품, 달걀까지 먹는 채식 유형)고 집에서 요리해서 먹을 땐 최대한 비건(채소류만 먹는 채식 유형)으로 먹어요."이다. 실제 일상에서는 어디선가 읽은 '덩어리주의'가 더 맞을 것 같은데 고기 덩어리는 먹지 않지만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유연할 수 있는 유형일 것이다. 예를 들면 밖에서 육수를 낸 탕이나 시판 반찬은 먹는 것으로 타협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집에서 직접 요리할 때는 비건식으로 요리한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를 채식인이라고 말하기 꺼려지는 이유다. 우리는 특히 비주류의 라이프스타일을 채택한 타인에게는 너무나도 엄격하다. 온전하게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한 번의 예외라도 있으면 그 순수성을 의심받고 고작 이 정도로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지 평가한다. 이런 말을 실제로 하겠는가 싶으면서도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자 힘든 요소이다. 


지금까지도 나와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채식 지향성을 알고 있고(최소한 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엄마마저 가끔은 까먹지만) 이에 대해서 별다른 평가나 반응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채식을 시작한 초창기에는 가족을 포함해서 상당히 강한 어조로 말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말은 "네가 그런다고 얼마나 세상이 바뀔 것 같아? 환경주의자 납셨네."이다. 결이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무에게도 채식을 하라고 강요하기는커녕 권한 적도 없는데 당시의 그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가장 어려운 질문이자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인 왜 채식을 하는지는 물어보는 사람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이미 본인은 채식을 절대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집이 느껴지는 던지는 말투일 땐 가볍게 웃으면서 '해보니까 할만하다' 정도로 대답한다. 정말 궁금한 것도 아니기에 쓸데없는 논쟁을 피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다.

가끔씩 본인은 절대 못 하겠지만 그래서 채식하는 사람들을 리스펙 하며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이 때도 친밀도의 정도에 따라 수위를 조절하며 이야기한다. 가끔씩 이런 호기심 어린 태도로 물어보는 사람에게 여러 이야기를 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이 의도치 않은 큰 죄책감을 받아 공격적으로 느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궁금한지, 어느 정도로 궁금한지 모르겠는 상태일 때 가장 가벼운 대답은 내 건강을 생각해서 정도의 대답이다. 가끔씩 무언가 더 원하는 느낌이 들면 환경적인 이유나 동물권도 언급한다.


이런저런 눈치를 보지 않고 기대를 충족시켜 줘야 하는 의무감 없이 정말로 채식하는 이유를 말하자면 순수하게 '먹을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고기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그 맛있는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냐며, 힘들지 않냐며 묻지만 정말로 힘들지 않다. 왜냐하면 고기가 내 음식의 정의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야채를 거의 먹지 않고 고기가 없는 식단은 상상도 못 했던 내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이후로 더 이상 동물이 내 음식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힘들지 않다. 그래서 가족끼리 함께 밥을 먹을 때, 친구들과 함께 식사할 같은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고기를 먹고 있는 것이 나에게 부러움을 유발하지 않는다. 건강이나 환경적 장점은 부차적으로 딸려오는 긍정적 부산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인생을 힘들게 사는 어떤 사람들은 '그럼 생선은?!'이라고 되물을 수 있다. 생선은 음식의 범주 밖에 있다가 지금은 발을 걸치고 있는 회색지대다. 어떨 때는 음식처럼 느껴지고 어떨 때는 음식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음식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섭취하게 되더라도 약간의 죄책감이 수반된다. 이는 수은을 섭취하고 있는 스스로의 건강에 대한 죄책감과 어업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에 일조하고 있다는 윤리적 죄책감이란 이성적인 죄책감뿐만 아니라 살아있거나 살아있던 생명을 먹고 있다는 감정적 죄책감 모두를 의미한다. 채식 지향인으로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날라리 채식인인지라 일단은 여기에 멈춰 있는 상태이다. 느슨하기에 한계가 있지만 느슨해서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있다.


처음 채식을 시작한 2019년과 현재인 2024년 사이에는 큰 변화들이 있었다. 대기업인 비비고와 풀무원에서 채식 식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채식이 '힙해졌다'. 채식 전문 식당, 술집, 카페들이 생기고 채식 박람회도 반년에 한 번씩 여는 등, 채식이 더 이상 속세와 단절된 종교인이나 나이 든 분들의 식문화라는 느낌이 덜해졌다. 2019년엔 채식 전문 반찬이나 브랜드가 없거나 정말 맛이 없어서 그냥 내가 다 해서 먹는다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채식 반찬을 배달해 주는 사이트도 있고(올해 꾸준하게 주문해서 먹고 있는데 약간 겹치긴 하지만 반찬가게의 대안으로 아주 좋다. 물론 발생하는 일회용 쓰레기는 또 다른 고민거리다) 비비고 채식만두는 고기를 정말 좋아하는 가족들이 꼽은 시판 만두 중 1등이다. 제철채소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채소 고유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비빔밥에서 야채를 빼고 먹던 내가 이제는 나물만 있는 비빔밥을 먹게 되었다. 비행기를 탈 때면 특별기내식을 신청하고 해외여행을 갈 때면 그 나라의 채식 식당을 최소한 한 번은 가거나 마트에서 파는 채식 식품을 먹어보려 한다. 무엇보다 그 사이 약간의 내공이 쌓인 느슨한 채식인은 모임 뒤풀이 장소를 정할 때 고깃집이 아닌 곳 또는 고기 외의 먹을 곳이 있는 곳을 고려해 달라고 한다.  몇 번 본 사이인 경우에는 편하게 고기를 안 먹는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나의 건강을 염려했던 가족들은 네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하거나 본인도 고기를 줄일 계획이라고 알려주었다. 단 한 번도 채식하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특히 주변인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느슨한 채식의 느슨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어 뿌듯했다. 채식 커뮤니티의 유명한 멘트이자 가장 좋아하는 멘트는 <한 명의 완전한 비건보다 열 명의 비건 지향인이 더 큰 변화를 만든다>이다. 이 멘트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는 것, 그것이 내게 느슨하게 채식하는 방법이자 원동력이다.



이전 04화 느슨한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