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철학 노트, 억압 2편
지난번 <유용함은 인간을 억합한다>에서 이어지는 두 번째 글이다.
과거 블로그에 썼던 글이지만, 약간의 편집을 거쳐 브런치로 다시 옮긴다. :)
지난번 글에서 우리는 '억압'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시 들여다봤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가 흔히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성실함과 게으름에 대한 믿음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각자 나름대로 답을 생각해보라.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수면 주기를 연구하는 신경학자, 러셀 포스터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정도입니다."
결국 별 차이 없다. 그리고 관중들은 손뼉 치며 환호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서 보시라. ‘수면’에 대한 좋은 강연이다. 한국어 자막이 있으며, 해당 발언은 16:45초쯤에 있다. (링크는 여기 http://on.ted.com/Foster) 나 역시 한참을 웃었다. 그렇다. 성실한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들은 게으른 자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을 말 그대로 '게으른 사람들'로 본다. 딱 한번 필터를 씌울 뿐이지만 그 타격은 크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그렇게 반대편 시선에 의해서 손쉽게 억압받는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비슷한 맥락으로 ‘목표’는 ‘방황’을 억압한다. 그렇지 않은가?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우리에게 하는 잔소리가 있다. "넌 꿈이 뭐니? 넌 나중에 하고 싶은 게 뭐니? 올해 목표는 뭐니?" 지금은 그 말이 정말 나에게 관심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단지 ‘할 말이 없어서’ 던졌던 것임을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만들어낸 어릴 적 나의 꿈은 ‘과학자’다. 그러면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ㅋㅋ) 이처럼 '꿈이 분명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꿈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무시하거나 억압한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왜 나처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고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자기계발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왜 결단을 세우지 않으며, 왜 목표를 적지 않냐고. 왜. 왜. 도대체 왜 나처럼 살지 않느냐고 외친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오류를 나역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직 멀었다. 20대 중반,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던 나의 당시 꿈은 ‘20대 멘토’가 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멘토링을 해주겠다는 건지, 지금 생각하면 분명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에겐 하나의 ‘꿈’이었다. 그리곤 철 없이 외치고 다녔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고. 그 말이 적절한 ‘방황'과 '쉼'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에겐 얼마나 억압적이었을까. 평생 죄를 갚으며 살기에도 모자란 죄를 지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분명한 목표가 삶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설득할 자유는 있고, 또한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강요해선 안 된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다.
방황을 할 때는 당장 그날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되,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묻지 말아야 한다.
- 구본형 -
그렇다. 어쩌면 모든 구분은 억압일지도 모르겠다. 선은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점이 되며, 그와 동시에 악을 억압한다. 전문가는 스스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기준이 된다. 그리곤 자연스레 '내가 아닌 누군가를' 억압한다.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하나의 주제에 관해서’ 함께 존중받으며 활발하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것이 상상되는가? 특히 우리나라에서? 그런 장면을 쉽게 보기 어렵다. ‘전문가’에 대한 환상은 특히 한국에서 강한 편이다. 전문가는 그 존재로서 비전문가를 위축되게 만들고, 자연스레 발언권을 뺏는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자기 자신을 전문가라고 칭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편이다. 까닭은 위의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타인과 분명히 기준 짓는 사람일수록, 그 기준으로부터 타인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란 되려 어려운 법이기에. (게다가 전문가가 되기 위해 투자를 많이 했을수록 더더욱 어렵다.)
<차이와 반복> <안티 오이디푸스>로 유명한 철학자 질 들뢰즈는 '분리'를 '층화'라 칭했다. 그는 말한다. "층화 된 사회일수록 고착화된 사회라고." 계층을 넘나들며 대화를 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생각하면 된다. 반면 탈층화 된 사회는 서로 자유롭게 관계를 맺어가며 훨씬 더 역동적 삶을 창출한다. 이처럼 들뢰즈는 모든 사물이 평등하게 ‘and (그리고)’의 관계를 맺는 것을 꿈꾼다. 사물들이 하나의 중심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어가면서 새로운 ‘and (그리고)’ 그리고 ‘between (사이)’를 만들어가는 모습. 이 형식의 사유를 들뢰즈는 ‘리좀’이라고 불렀다. (리좀이란 사물들이 접속과 일탈을 통해 자유롭게 관계 맺으면서, 장 전체를 만들어가는 사고를 말한다.)
아장스망(Agencement)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이 차이, 성별 차이, 신분 차이, 즉 차이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이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 질 들뢰즈
그래. 내가 원하는 사회가 바로 이러한 사회다. 그 누구도 전문가란 이름으로 상대를 억압하지 않으며, 서로를 ‘구분 짓지 않는’ 사회. 물론 꿈에 가깝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그것을 원한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대학교 다닐 때 동문회나 향우회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로써 자연스러워진다. 사실 어릴 적부터 그런 집단에 대한 이상한 반감이 있었는데, 그 반감의 이유를 시간이 지나며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식의 수동적이고 고착적인 만남이 아닌,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만남을 원한다.
정리해보자. ‘분리'는 억압을 만들고, 억압은 '소외'를 낳는다. 다시 말해 우린 분리선을 기준으로 서로를 억압하고 서로로부터 소외된다. 관계는 그렇게 단절되며 각자의 공간에서 우리는 파편처럼 살아간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끼리. 선함은 선함끼리. 유용함은 유용함끼리. 그렇게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준들은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 반대편의 진실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그 이유로 우리의 삶이 자유롭지 못하고, 삶의 생동감과 가능성을 잃어버리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겐 결국 끝없는 정진이 필요할 뿐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 그 새로운 눈을 갖는 훈련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삶과 대면하는 것이다. ‘옳다고 주장하고, 구분하고, 억압하는’ 내 모습과 계속해서 직면하는 것이다. 모든 분리는 인간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기억하자. 앞서 말한, 무용함과 유용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은 분리해서 읽을 수는 있으나 서로 분리될 수는 없는 어떤 것이다. 분리하려는 우리가 있을 뿐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쉽게 주장해 본다면,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것, 자명하다고 믿고 의지하는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일 수록 그것은 되려 상대를 강하게 억압하는 근거가 된다. 흔히들 옳다고 느껴지는 개념 마저도, 예를 들어 ‘깊이 있는 삶’ ‘친밀한 관계’ 심지어 ‘타인에게 기꺼이 헌신하는 삶’ 마저도, 억압의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옳다는 느낌이 있을 때, 그리고 타인에게 그 기준을 강요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린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나 역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타인에게 억압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여태 살아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특히 가까운 아내와 가족들)에게 내 가치를 주입하고, 억압했는지. 그 축적된 억압들은 내가 앞으로 평생 갚아 나가야 할 나의 업이다. 나는 이러하다. 당신은 어떠한가? 무엇을 억압하는가. 아니, 당신은 무엇을 자명하다고 믿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