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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욱 Jan 13. 2019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 (1)

관계 Relationship

가끔은 몸이 먼저 기억한다. 


지난 10년간 걸어온 길을 생각해보면, 내가 잘 나서 이뤄낸 것은 거의 없다. 나도 물론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대부분 주위 사람의 도움이었다. 나의 꿈을 존중해주고,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고마운 분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다양하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또한 어떤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어떤 사람들과 거리를 둬야 하는지도 배우게 되었다. 이러한 분별은 체계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아니다. 그 보다 좀 더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몸이 반응하는 기준에 가깝다. 이는 처음으로 운전을 배웠을 때의 경험과 비슷하다.  


운전을 배울 당시 내게 어려웠던 것은 앞뒤 좌우 간격을 인지하는 것이었다.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회전 때마다 옆 차와 부딪칠 것 같고, 주차 시에도 한참이나 헤맸다. 그때 연수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어느 정도 운전해야 차 간격을 정확히 알 수 있나요?” “시간이 걸리죠. 하지만 빨리 알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양옆을 한번 싹 긁혀보면 됩니다. 그때 경험은 절대 잊히지 않거든요. 그 간격을 몸이 기억하고, 그다음부턴 알아서 피합니다.” 단순하지만, 인상 깊은 조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운전에만 해당되는 비유가 아니었다. 사람 관계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배우기 마련이지만, 다치고 상처 받으며 빠르게 터득하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내가 경계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거나, 간격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편견 없이 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론 맞는 말이지만, 나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람이 되길 원하지도 않는다. 앞으론 더 성숙해져야겠지만, 지금은 내가 가진 한계와 기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을 경계하는 것일까? 총 5가지의 특징이 있다. 2부에 걸쳐서 작성해 보도록 한다.  




첫 번째.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는 유형이다. 작게는 작은 약속부터, 크게는 회사의 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이 기준은 사람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지만, 판단하기 어려운 요소이기도하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다른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직업 자체가 말을 많이 필요로 할수록, 불리하다. 김제동도 집으로 갈 때마다 "내가 말했던 것의 반의 반만큼이나 살자"며 자책했다고 한다. 나 역시 강의와 코칭을 업으로 했었기에 여기서 떳떳하지 못하다. 모두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의 간격을 주의 깊게 살피고 줄여나가려는 의지다.  


이러한 자기 인식과 실천은 결정적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드러나기 마련이다.  간격을 좁히려는 사람과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사람으로. 실천하지도 못할 말과 글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그런 사람들을 판별하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이나 생각이 아닌, 그 사람이 내리는 선택과 행동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관계를 맺을 때, 천천히 다가가는 것도 필요하다. 오래오래 함께 할 사이라면 느긋한 것이 더 좋다.  




두 번째.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일한다.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일에 몰두하기에 좋게 볼 수도 있지만, 정도가 심하면 위험하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건강하게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일과 본인의 삶이 철저하게 구분된다. 물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지금의 사회에서 적절한 구분은 필요하지만 너무 지나친 것은 문제다. 오로지 일 혹은 자신의 전문 분야만 이야기하려는 사람들, 높은 벽을 쌓는 사람들, 본인의 삶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경계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라보는 시야가 좁고, 책임감이 약하다는 것이다. 시키거나 해야 할 일에는 충실하지만, 그 외에는 무관심하다. 장기적으로 어떻게 되든,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든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것을 할 뿐이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말한 아이히만처럼. <악의 평범성>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 싶은 것도 그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행동을 불러올지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소중하게 생각하는 신념으로부터 말이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살아가는 이야기, 삶의 중요한 의사결정들, 어떤 목적으로 일하는지 등. 그 과정이 누군가에겐 TMI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서로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라고 믿는다. 그 사람이 추구하는 삶과 신념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간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결국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훌륭한 교사는 공과 사가 만나는 교차지역에 서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마음의 상처를 줄이기 위해 우리 교사들은 학생, 과목, 심지어 스스로부터도 도망친다. 우리는 내적 진실과 외적 연기 사이에 높은 벽을 쌓고 교사라는 역할을 연기한다.” (파커. J. 파머) 


hannah arendt



세 번째,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지금은 자기 PR의 시대이고, 자신감있는 태도는 권장할 만하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친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학교나 회사, 언론 노출 경험, 혹은 인맥이나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 등으로 스스로를 크게 과장한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경계하는 사람은 한발 짝 더 나아간다. 자신을 은연중에 높이면서, 함께 대화하는 상대도 자극한다. 마치 “나는 특별해. 너도 이제 이런 나와 함께 있으니, 특별해질 수 있어”라고 교묘히 말하는 듯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쉽게 설득된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원하는 꿈을 드디어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비전 제시가 아니냐고 말하지만, 목적이 다르다. 비전 제시는 상대가 바라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여 결과적으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만, 이것은 상대의 욕망을 자극해서 결과적으로 본인에게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평소 귀찮은 것을 싫다고 말하지만,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다. 유명세를 얻게 되면 그 사실을 주위에 슬쩍슬쩍 알린다. 또한 이들은 첫 만남에 상당히 호의적이다. 물론 상대에게 어느 정도 얻을 것이 있다고 판단이 되는 경우에만 그렇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차갑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상대를 간파하고, 접근하고, 호의를 보인다. 그리고 욕망을 자극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과 함께라면 나도 특별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력도 자존감도 모두 낮았던 시절에는 더욱 크게 이끌렸다. 몇 년의 세월을 거치고서, 제 자리로 돌아왔다. 결국, 우리 모두는 스스로 서야 한다. 서로에게 강하게 의존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못하다. 작게라도, 혼자 힘으로 걷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다.  



To be continued.. 

PS: 제 블로그 글을 일부 수정하여 업로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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