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규암: 기억을 엿보는 바위 이야기
K의 메일을 발견한 건 화상 회의가 두 시간을 넘어가던 때였다. 화상 회의실은 화면을 앞에 두고 부사장과 간부들이 정확히 디귿 자로 앉았다. 폰을 누이고 포털에 접속해 하릴없이 메일 리스트를 살살 긁고 있었다.
중간에 특이한 제목이 보였다.
“Hi. My name is Chair King.”
안마의자 아니면 리클라이너 로구나.
잠깐 체어 킹 이라니.
‘체어 킹이면 의자의 왕?’
“의자왕?”
부사장이 말을 하다가 입을 벌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발신인은 K. 그 K였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로 돌아온 나는 모니터로 메일을 다시 열었다.
“안녕. 나 LA에서 00일보 다니고 있어. 새로 온 사장이 교포 광고주들이 좋아할 만한 칼럼을 해보라고 한다. 갑자기 네 생각이 났다. 답신 부탁. 일주일에 한 편.”
그 신문사라면 방송국도 끼고 있는 중견 한인 언론사였다. 아직도 미국에, 그것도 신문사 밥을 먹고 있구나. 그나저나 20년 만에 날아온 메일에 인사도 안부도 없는 건조함이라니, 불쑥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곤 하던 그와 똑 닮았다.
K는 30년 전 나란히 신문사에 입사한 동기 중 하나다. 그는 20년 전 내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이 회사 홍보 담당으로 옮긴 직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 단체용인지 개인용인지 모를 짤막한 메일을 남겼다.
“간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끝.”
K와 내가 엮인건 입사 직후 선배들이 베푼 환영식 자리였다. 나는 “삼천궁녀 중에 제일 예쁜 궁녀가 안 죽고 살았는데, 내가 그 후손”이라고 소개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나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어떻게든 관심을 끌고 싶은 바보 같은 소개였지만 선배들의 흥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거푸 찾아오는 술잔을 넙죽넙죽 받아먹던 내 옆에서 K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술잔을 돌리던 선배가 그에게 물었다.
“야. 넌 왜 말이 없어? 불만 있어?”
“죄송합니다.”
“넌 뭐, 의자왕이야?”
다음 날 친구로 등록돼 있지 않은 모바일 전화가 뜨자 K인 줄 알았다.
“오랜만이네. LA라고 했지?”
“어. 오랜만. 글 좀 생각해봤어?”
“L도 있잖아. 왜 나야.”
“그냥 뭐. 네가 쓸 것 같아서.”
“나 글 써본 지 오래 됐어. 다른 사람 알아봐라.”
“그, 백마강 써봐. 네 고향이잖아.”
“백마강? 웬 백마강?”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일단 서 너 편만 보내봐.”
“인터넷에 이름 뜨는 거, 그것도 부담이야.”
“필명 쓰면 되지. 그리고 온라인에는 당분간 안 올릴게. 기다린다.”
K에게 글을 보낼 생각을 하니 심란하기만 했다. 보고서 따위 말고 글 같은 글을 써본 건 10년도 전의 일이었다.
5년 전 사외보에 썼던 글이 생각났다. 고향 부여의 백마강, 부소산, 낙화암 같은 관광지를 소개한 글이었다. 대충 고쳐서 보내놓으면 K도 그만하자 하겠지 계산이 섰다.
필명은 궁리 끝에 삼천궁녀라고 썼다. 이틀을 뭉개던 나는 금요일 밤이 돼서야 글을 열었다. 하루 동안 고쳐서 K에게 보내놓고 손을 털 작정이었다. 계획은 빗나갔다.
앉은 채로 토요일 새벽을 맞은 나는 일요일도 책상 앞에 있었다. 글 한 편을 보낸 건 일요일 자정 무렵이었다.
다시 일주일간 두 편을 연달아 보내고 나서야 내가 글을 고친 게 아니라 새로 썼다는 걸 알았다.
금요일 저녁 송고를 끝내고 회사를 나섰다. 이마에 닿는 맞바람이 유난히 서늘했다.
그건 분명, 강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