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1975, 나의 규암

소설_규암: 기억을 엿보는 바위 이야기

by 설기

2. 1975, 나의 규암


백마강을 가로지르는 백제교를 건너면 바로 우리 동네인 부여군 규암면에 접어든다.

백제교를 다 건널 무렵 나타나는 엿바위를 볼 때마다 먹는 엿이 생각났다.


아무리 쳐다봐도 엿 같지 않아 어느 날 아빠에게 물어보니,

먹는 엿이 아니라 ‘엿 본다’의 엿이라고 했다.


내가 사는 규암(窺岩)도 엿보는 바위를 한자로 쓴 말이며, 바위 모습이 누구를 엿보는 것처럼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어 엿바위라고 불렀다고 했다.


가뜩이나 규암도 귀암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 엿이 그 엿이 아니라니 어린 체면에도 창피한 노릇이었다.


면사무소와 우체국이 있는 면 소재지의 위용을 갖춘 규암리에서 우리 집은 아슬아슬하게 경계에 걸쳐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규암리가 아닌 외리 2구였지만 면 소재지의 위상에 걸맞는 위치에 있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주변에서 제일 큰 한일식품과 진짜 마네킹이 있는 미인 양장점이 우리 집 바로 옆에 있었다는 게 그 증거다. 한일식품에는 과자부터 과일, 쌀, 장작, 소시지까지 없는 게 없었다.


플라스틱 양동이와 양은 냄비, 세숫대야, 빨간 고무 다라이도 있었다. 나는 이름을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대형마트인 셈이었다.



학교도 안 다니는 여섯 살 꼬맹이 주제인 나는 하루가 길기만 했다. 뽀얀 신작로 먼지를 뒤집어쓴 대문 앞에 누군가 척척 물을 뿌리면 새 하루가 시작됐다.

바가지로 대충 뿌리는 물은 땅에 닿으면 올망졸망 뭉쳐져 귀여운 무늬를 만들어냈다.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다가 물을 끌어와 머리도 그리고 눈도 그리다가 싫증이 나면 엄마와 양장점에 들어갔다.


쓰다 만 조각 천들과 초크가 모여 있는 작업대 옆에 앉아 있으면 아줌마들은 어제와 똑같은 질문을 해댔다.

“꽁미 꼬추는 언제 나오나? 나올 때가 됐는데.”

“……내일이요.”

“하하. 어제도 내일이라며. 오늘이 내일이야.”


시간 개념이 확실하지 않던 나는 ‘오늘이 내일’이라는 말이 자면서도 헷갈리기만 했다. 바지를 추스르다가 고추가 나온다는 곳을 다리를 벌리고 한참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젠 대답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잠이 들어도, 다음 날이 되면 어김없이 양장점에 가는 시간을 기다리곤 했다.


수선스러운 어른들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파묻혀 있는 느낌은 고소하고 안온했다. 양장점 창문 사이로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빠를 발견하고 뛰쳐나가는 일은 내겐 최고의 행복이었다.


하루는 식품점 모퉁이에 멍하니 서 있다가 아빠가 잘못 던진 망치에 발등을 맞았다. 헐레벌떡 뛰어온 아빠는 발등을 쓰다듬다가 나를 들쳐 업고 집으로 갔다.


걸음을 따라 규칙적으로 진동하는 아빠의 등은 마치 요람 같았다. 설핏 선잠이 들었다 깨어난 내게 더없는 아늑함이 밀려왔다. 깬 걸 비밀로 할 작정으로 입을 벌린 채 침을 삼키다 기침을 할 뻔 했다.


꿀꺽 삼킨 침에서 단 맛이 올라왔다.
배꼽 저 안의 깊은 곳이 슬슬 간지럽다가 온 몸이 푹 꺼지던 그 순간.
행복이었다.
그 몇 초의 유년으로
우리는 한 생을 나기도 한다.



1976년 일곱 살의 봄이 되자 또래 아이들이 우르르 학교에 가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더 이상 양장점 정도에 만족할 나이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엄마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즈음, 한일식품에 남자 아이 하나가 왔다. 혼자서 서울에서 왔다는 그 애는 엄마와 아줌마들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한일식품 안주인의 친척 조카라고 했다.


자식이 없으니 아들 처럼 거둔다는 말에 동네 사람들은 너도나도 찬사를 보냈다. 엄마는 그 애도 나처럼 학교에 갈 거라며 잘 지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 애를 처음 본 건 한일식품에 뉴 뽀빠이 과자를 사러 갔을 때였다. 빡빡머리에 깡마른 그 애는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돈 통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게를 보는 건지 정신을 놓고 있는 건지 멍한 시선을 따라 내가 돈을 건네자 슬쩍 손을 내밀었다.


털실로 짠 고동색 도꾸리의 소매 단이 도르르 말려 올라가 손목이 다 드러나 있었다. 서울서 왔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닌가.


순간 파리채를 사모님이 나타나더니 돈 통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이놈의 파리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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