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규암: 기억을 엿보는 바위 이야기
5. 집의 의미
규암 수북정 나루터에는 부소산 고란사에서 출발한 유람선이 들어와 손님들을 내려놓고 갔다.
매운탕이나 민물장어를 파는 집에는 전국에서 백마강을 찾아온 사람들이 입맛을 찾아와 북적거렸다.
같은 반 순정이 엄마는 나루터 앞에서 땅콩과 쥐포를 파느라 하루 종일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학기 초에 전학 온 순정이는 장터에 임시로 지은 판잣집에 산다고 알고 있었다.
원래 순정이 할아버지는 동네 어귀에서 양조장을 할 정도로 부자였는데 큰 병에 걸려 재산이 축났다고 했다. 그 아들인 순정이 아빠까지 비슷한 병에 걸려 고향에 돌아온 것인데 살 집이 없다고 엄마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었다.
순정이는 동생을 업고 나루터에 나와 엄마를 대신해 땅콩을 팔기도 했다. 하루는 순정이가 땅콩을 파는 사이 동생을 업은 순정이 엄마가 양은 도시락을 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총각김치를 맨 손으로 집어 와그작 베어 물고는 강 한번 하늘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손이 시리겠다는 생각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엄마와 규암 장터에 뻥튀기를 튀기러 갔던 일요일이었다. 뻥튀기 자루를 든 엄마 뒤에서 덤으로 받은 봉지를 돌리며 따라가던 나는 문득 순정이의 집이 생각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장터 쓰레기들을 모아두는 곳에서 순정이가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불렀다.
“순정아. 너 네 집 이 근처야?”
순정이는 화들짝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뒤 춤에 팔을 돌려 무얼 감추고 있었다.
“그래. 이 근처야. 저기.”
“잘됐다. 같이 놀자.”
엄마에게 냉큼 이야기하고 뛰어간 내 눈에 순정이의 허리 뒤로 삐죽 나온 퍼런 무청이 보였다. 쓰레기에서 저걸 찾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버리려던 것일까. 그녀의 등 너머로 얼기설기 맞대놓은 판잣집과 문 대신 쳐놓은 비닐이 보였다.
빨랫줄에는 며칠 전 동생이 입었던 내복이 널려 있었다.
“순정아. 저기구나.”
“응. 근데 나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럼 너 네 집 가서 뻥튀기 먹을래?”
마지못한 순정이는 무청을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앞장서 걸었다. 어쩐지 여기서 돌아서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비닐을 들추고 신발을 벗은 그녀가 먼저 집으로 들어섰다. 비닐 장판이 깔린 바닥은 울퉁불퉁했지만 생각보다 푹신했다.
어둑한 실내에 길게 가로놓인 이불 더미가 보였다. 그 옆의 노란 양은 주전자와 이 빠진 사기 밥그릇도. 낡은 캐시미어 담요 끝에 위태롭게 걸린 물체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담요를 목까지 뒤덮은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야.”
볼이 훅 팬 모습이 흡사 해골이 누워있는 것 같아 내가 흠칫 놀라자 순정이는 다 안다는 듯 주저앉아 이불을 가다듬었다. 시접이 뜯긴 솜이불 두 채와 까맣게 때가 오른 베개들, 먹다 남긴 김치 통,
오래된 소쿠리들이 오종종 모인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
“이 지지배야. 보리쌀 불린 거 건져놔야지.
뭐하고 있어?”
총각김치를 베물던 순정이 엄마였다. 후다닥 뛰쳐나온 나를 순정이는 처음 만났던 곳까지 따라 나와 손을 흔들었다.
그녀 옆으로 노란 해바라기가 껑충하게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정이네는 한 달이 조금 지난 추석 직후 조용히 사라졌다. 판잣집을 허물어 깨끗이 치워놓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연히 지나다 본 그 곳엔 해바라기가 다 시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를 데리고 판잣집 비닐을 걷던 그녀의 철든 고개 같아 계속 뒤돌아보았다.
얼마 후 우리는 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었다. 시멘트가 깔린 깨끗한 부엌과 장독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집. 장독대 계단은 부엌을 타고 옥상까지 우아하게 이어져 있었다.
고모는 라디오를 대놓고 크게 틀며 새 집을 반겼다. 땅바닥이 아닌 시멘트가 발린 부엌 바닥은 누워 자도 될 만큼 안락했다.
영훈이네 집만큼은 안 돼도 맨 땅이 없는 집은 동네에 흔치 않았다. 새 집에서 나는 페인트 냄새는 차의 배기가스만큼 나를 설레게 했지만 냄새가 가시기도 전 우리는 이사를 했다.
3학년 가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안방을 열자 엄마가 담요를 깔고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방 안을 낮게 울리고 있었다.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판잣집 비닐을 걷던 순정이의 낮은 고개가 다시 생각났다.
한 달 후 우리 가족은 이삿짐을 쌌다.
이사를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