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_첫사랑 공식인증센터

소설_규암:기억을 엿보는 바위 이야기

by 설기

중2 겨울방학, 아침 일찍 목욕을 다녀오던 한일식품 곰보 선생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은 강둑마을에도 금방 전해 졌다.


있는 듯 없는 듯 책이나 읽으며 사는 곰보 선생이지만 몸져누워 버리면 그 수발을 누가 하느냐는 것에 모두의 관심사가 모였다.


사모님이 자리보전한 남편을 뒷수발할 성정이 아니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겨우 중학생 재준이가 친아버지도 아닌 육촌 이모부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지 나까지 걱정이 됐다.


집에 놀러 온 사진관 집 아줌마가 엄마 앞에서 식혜를 들이키며 말했다.

“그 사모님이 바깥출입을 전혀 안 한대. 그래도 자기 서방님인데 자기가 손을 써야지 방법이 있겄어.”


“재준이는 어떡하고 있대요. 한번 가 봐야 는데.”

“걔가 가게 안팎을 쓸고 닦고 다 하지. 진짜 어디서 그런 애를 데려왔을까.”

“아니 박 씨는 뭐하고.”


“아직 몰라? 며칠 전에 읍내 샛별 미장원 여자랑 바람나서 도망갔잖어. 밤새 날랐댜.”

“예에? 그 미장원 집요? 거기 딸도 있지 않어요?”

“박 씨랑 그 여자랑 어려서부터 좋아했다지 아마. 그래도 그게 뭔 짓이여? 애까지 놔두고. "


중3이 되자 아이들 사이에서 이상한 유행이 번졌다. 누구와 누구를 짝지어 공식적인 커플로 만드는 것이었다.

1반 반장 유경식은 5반 부반장 강영주를 좋아하고, 태권도부 이재필은 무용반 김희진을 좋아하고, 말하자면 첫사랑을 맺는 것이었다. 짝이 된 아이들은 주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커플로서 공식 인증을 받는다.


문제는 아직 그런 커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소문, 소문뿐이었다.


경미는 2반 이길영을 맘에 두고 있는 눈치였다. 이길영은 학교 유도부에 속한 장대 같은 남자애였다.


중학생 치고 껑충했지만 먹는 것 외엔 관심이 없게 생긴 전형적인 먹보 상이었다. 그런 애를 경미가 좋아하는 이유를 나는 알 것 같았다.


그 애의 아빠는 유도선수 출신 경찰이었다. 작년 규암 지서에 승진해서 온 이길영 아빠는 사건 때만 아니라 순찰을 돌 때도 사이렌을 켜고 다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깍두기 머리에 가죽점퍼를 입고 어깨가 떡 벌어진 수사반장 스타일이어서 고상해 보이지 않았지만, 경미는 자기 아빠 때문인지 몰라도 힘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경미에 비해 나는 뚜렷이 짝을 지을 애가 없었다. 나는 그즈음 안경을 금테로 바꾸고 앞머리를 길러 테에 살짝 걸치게 하고 다녔다.

학교에선 글짓기대회가 열리면 다른 아이 몇 명과 대표로 나갔고, 어느새 소설과 시에 관심이 많은 어엿한 문학소녀가 돼 있었다.


그런 나의 짝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길영 같은 아이는 절대, 절대 아니었다.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은 아침부터 설레었다. 게다가 토요일이었다.


극장의 어두컴컴하고 습한 공기가 주는 설렘은 예쁜 옷을 입거나 소풍 갈 때의 그것과는 달랐다. 인생에 한 번쯤은 비운에 압도되거나 사랑 하나에 다 무너져 내려도 괜찮을 것 같은 이상한 용기가 불끈 솟아나곤 했다.


그리고 한 떼의 아이들 속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 화려하게 주목받고 싶은 마음이 버무려져 극장 안은 어린 여인들의 설익은 음기로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 날의 영화는 ‘고래사냥’이었다. 주인공 병태는 일단 미남이 아니었고 도둑 누명을 쓰고서도 어리바리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얼간이 같아 실망스러웠다.


말을 못하는 춘자를 굳이 고향으로 데려가는 마음도 이해를 못하다가 결국 내 눈물이 터진 건 춘자의 말문이 트인 순간이었다.


사랑은 화려한 일을 같이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애를 쓰는 것,
그 사람을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사라져도 되는 것이었다.


극장을 나와 봄 사이 부쩍 가까워진 인순이와 빵집에 갔다. 인순이는 성격이 어른스럽고 차분하며 나와 글짓기대회에 나간 적도 있어 말이 통했다. 경미 와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길영을 좋아한다는 걸 안 이후였던가.


인순이가 빵을 먹다가 말했다.

“저기 밖에서 누가 너 본다.”

“누가?”
“들어오는데?”

인순이가 아는 척을 했다.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그 애를 보자 예전에 비슷한 상황을 본 것 같았다. 데자뷔다.

“오랜만이다. 빵 먹니?”

강석현이었다.

‘엄마에게 돈 갚으라고 하라’ 했던 그 반장 아이. 보이스카웃.

벌써 6년 전의 일이건만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앉어. 강석현. 너도 영화 봤지?”

인순이가 역시 어른스럽게 자리를 권했다.

나는 맞선에 끌려 나온 시골 처녀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소보로빵만 바라봤다.

셋이 빵집을 나와 계백장군 사거리에 이르자 인순이가 자기 동네 버스가 왔다며 서둘러 가버렸다.

강석현과 남은 나는 버스가 오는 쪽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는데.”

“뭐가? 무슨 얘긴지 모르겠는데?”

나는 버스를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강석현이 소리쳤다.

“야. 다음 주 일요일에 아까 그 빵집에서 기다릴게. 두 시에.”




월요일이 되자 인순이가 우리 반으로 와서 강석현 이야기를 꺼냈다.

“걔 어렸을 때 우리 옆집에 살았어. 너는 강석현 어때?”

인순이는 4학년 그 날의 오후반 이야기를 모르는 듯 했다. 다행이었다.

나는 강석현에게 최대한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그래? 걔는 내 스타일 아니야.”

“그래? 진짜야? 걔 좋아하는 애도 있을걸. 잘 생겼잖아.”

“잘 생기긴 뭐가. 얼굴이 여자같이 희멀겋잖아. 개성이 없어.”

“그런가? 하하.”

인순이는 내가 강석현이 싫다고 하자 희한하게도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경미가 그런 우리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멀어진 걸 서운해 하고 있었다. 순간 경미가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일요일 읍내에 나갔지만 빵집에 가지 않고, 경미와 안경원에 갔다.


경미가 자기도 지적으로 보이고 싶다며 안경을 맞추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안경원에서 나와 샛별 미장원 앞을 지나쳤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얼마 전 비바람이 몰고 온 먼지가 문틀에 가득 고여 있었다.

비극의 현장이었다. 극장에서 느끼던 압도적인 운명의 현장 말이다.


박 씨 아저씨와 미장원 아줌마는 어디로 갔을까.


사랑 때문에 도피하는 사람들이 가는 동네가 따로 있는 걸까.

안경을 쓴 경미가 쇼윈도에 얼굴을 요리조리 비춰보며 말했다.

“이길영이 저번에 그러더라. 자기는 책만 보면 1초 안에 잠든대. 그러면서도 유식한 사람이 좋대. 웃기지? 나 어때? 유식해보이냐?”


강석현이 기다릴 빵집이 맘에 걸렸지만 그냥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강석현 생각을 한 건 사실이었다.


강석현이 다가와 또 말을 건 날은 바로 다음 날인 월요일 하굣길이었다. 경미와 교문 앞 문방구 앞을 지나는데 자전거 한 대가 와서 붙었다. 몸을 비켜주려고 길 안쪽으로 들어서자 자전거가 멈췄다.
“너 왜 안 나왔니?”

돌아보자 강석현이었다. 화를 애써 참고 있는지 콧구멍이 가늘게 달싹거렸다.

“내가 간다고 안 했잖아.”

영문을 모르는 경미가 양 쪽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이번 주 일요일에 보자. 이번엔 나올 수 있지?”

“야. 내가 왜 나가야 하는데? 왜 맘대로야?”

당황한 강석현이 움찔했다. 지나던 아이들이 걸음을 늦추어 가며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가슴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아니 그냥 빵이나 먹자고.”

“내가 빵 못 먹고 죽은 귀신 붙었니? 너나 많이 먹어.”

나는 홱 돌려 걸었다. 말과 몸의 리듬이 착착 맞았다. 경미가 쫓아오며 말했다.

“야. 너 무섭다.”


엉거주춤 자전거에 다시 올라타고 멀어져 가는 강석현을 보며 생각했다.

강석현은 오로지 바람 맞은 자신을 걱정했다. 내가 빵집에 왜 못 나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물었다면 나는 돌아오는 일요일 빵집에 나갈 수도 있었다.

강석현은 그렇게 첫사랑 예선에서 가볍게 탈락했다.

인순이가 강석현에게 대시했다가 차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왠지 소문 같지 않았다.


얼마 후 집에 막내 외삼촌이 왔다.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막내 외삼촌은 서글서글한 성격에 체격도 듬직한 꽃 총각이었다.

어릴 때는 마냥 까불었지만 오랜만에 본 외삼촌 앞에서 나는 괜스레 수줍어졌다.


심부름을 자청했다. 매운탕에 들어갈 콩나물을 사야 했다.

동네 구멍가게에는 채소가 없어 아빠의 자전거를 타고 한일식품으로 향했다.

걸어가도 될 걸 굳이 자전거를 탄 이유는 외삼촌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큰 길에 접어들어 조금만 달리면 한일식품이었다.



버스가 ‘빵’ 경적을 울리고 지나갔다.
놀란 나는 휘청하며 길 가의 큰 돌부리를 들이받았다.
자전거가 재주를 넘었다.


자전거 바퀴가 저 혼자 돌고 있었다. 겨우 일어나 앉으며 서러워 눈물이 터졌다.

희미한 시야 속에 누군가가 미친 듯 달려오는 게 보였다.


재준이 였다.
“아이고아이고. 조심을 해야지.”


재준이는 자전거를 들어 올려 길옆에 세워놓고 나를 부축해 가게로 갔다.


안집에서 수건을 빨아와 내게 건네주고 콩나물을 담았다. 그리고는 내 자전거를 올라타 나를 뒤에 태웠다.

한 손에는 콩나물을 안고 한 손으로 그 애의 허리를 살짝 잡았다.

페달을 밟는 양 다리에서 올라오는 진동이 내 손에까지 전해졌다.


집 앞에서 나를 내려주던 재준이가 앞을 본채 말했다.


“야. 근데 왜 답장 안 쓰냐? 오래 됐는데.”

나는 고개가 수굿해서는 안하던 내숭을 떨었다.


“알았어. 쓸게.”




다음날 이마에 대일밴드를 붙이고 간 내가 경미에게 말했다.

“나 사귀기로 했다.”

“누구누구. 강석현?”

“아니, 다른 사람.”

첫사랑 공식 인증의 날이었다.

센터장 경미가 내 팔에 도장을 비틀어 찍었다.


“빨리 말해.”
“아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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