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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28. 2019

#24 숙제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

없다면 없어도 되겠지

전편: #23 저기...우울 좀 반품 해보려고요.

https://brunch.co.kr/@simon1025/36#comment



대학생 때 온 열정을 다했던 테니스 동아리에서 선배들이 종종 해주는 이야기가 있었다. ‘테니스를 사람답게 치려면 힘 빼는 데에만 3년이 걸린다. 힘을 빼고 나서야 제때에 필요한 힘을 공에 실을 수 있다.’ 실제로 힘을 빼는 데에는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힘을 빼지 못할 때에는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니 테니스를 치고 나면 여기저기 쑤시는 곳이 많았다. 교사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곳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으니 괴로움이 찾아왔다. 덜어내기를 위한 첫 걸음은 힘을 빼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실천한 것은 숙제 줄이기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숙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많았다. 숙제는 아침부터 하여 하교가 끝난 시간까지 날 괴롭혔다. 아침 숙제검사 시간에는 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들의 명단을 보고 스트레스 한 덩어리, 쉬는 시간에 미처 하지 못한 숙제를 내팽겨 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고 스트레스 또 한 덩어리, 하교를 앞두고 숙제 검사를 맡아야 할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아! 외마디 소리와 함께 가방을 내려놓는 아이들을 보고 스트레스 또 또 한 덩어리, 숙제를 마저 끝내기 위해 남았지만 집에 가고 싶은 욕망에 자꾸 나와 협상을 시도하는 아이들을 보고 스트레스 그놈의 또 한 덩어리. 숙제를 받는 사람보다 내 주는 사람이 더 괴로운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지속됐다. 숙제는 아이들보다 나에게 더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내주었던 숙제에는 각각의 존재 이유가 있었다. 힘들지만 서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던 계륵인 셈이었다.


생각의 전환. 법륜스님이 그리하셨 듯 생각을 달리해볼 필요가 있었다. 지금껏 머릿속에서 품었던 것은 숙제의 존재 이유였다. 이제 숙제가 존재하지 않아도 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차례였다. 숙제가 존재하지 않아도 될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는 숙제의 효용성에 관한 불확실성이었다. 효용성은 그 동안 숙제를 내주었던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각각의 과목에서 배출되는 숙제에 대해 따졌다.

수학과목에서는 거의 매일 연산학습지가 나갔다. 아무리 원리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문제풀이는 충분한 연산 연습이 바탕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여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경우라면 연산학습지를 풀기 위해서라도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겠거니 짐작했다. 연산학습지를 통해 문제풀이능력이 향상되었음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연산학습지를 통해 스스로 원리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은 틀린 것 같았다. 그 동안 연산학습지를 풀어오지 않았던 아이들을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대부분이 수학시간에 어려움을 호소하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강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가 아니었다. 순리라면 원리를 이해하고서야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이었다.

과학, 사회 과목에서는 단원의 내용을 이미지로 정리해보는 비주얼씽킹 학습지를 내주었다. 잘 해오지 않던 아이들은 역시 비슷했다. 학습내용을 이미지로 치환시켜보는 것은 수업시간에 이루어졌어야 했다. 알아서 잘 하겠거니, 무작정 도움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은 온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이 느낄 숙제의 무거움이었다.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숙제가 있다는 것은 집에 가서도 공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숙제를 하지 못한 채 등교하는 길은 절대 편할 리가 없었다. 어른들의 삶에서 최근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있다. 워라벨. 일과 삶의 균형. 어른들조차 근무시간과 퇴근 후의 일상을 엄격하게 구분하려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공부가 일이다. 우리는 워라벨을 외치면서 아이들에게는 쉼 없는 공부를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세 번째는 숙제의 가시였다. 숙제를 해오지 않았는데 아이에게 칭찬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숙제를 줄곧 해오지 않는 아이는 외면하려해도 눈에 밟히기 마련이었다. 성실성의 문제, 혹은 숙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어떨 때는 꾸중이 나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한숨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것은 아이를 깎아내리는 행동이었다. 나는 숙제를 해오지 않는 것에 대해 상처를 받고, 아이는 선생님의 반응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서로 간의 관계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문제되는 것은 낙인효과였다. 숙제를 해오지 않는 것은 만천하에 공개되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성실하지 못한 아이, 공부를 못하는 아이로 인식되기에 딱 좋은 일이었다. 숙제의 가시가 아이의 자존감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제도가 아무리 좋다한들 그 제도의 부작용이 눈에 띄게 확실하다면 제도는 존재이유가 없어진다. 숙제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숙제에도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숙제로 인해 비롯되는 괴로움이 너무 컸다. 첫 덜어내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일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숙제를 처형시켰음을 공개했다. 환호성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아이들은 왜 숙제가 없어졌는지 영문은 모르지만 충분히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숙제가 없어짐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은 이후에 생각할 일이었다. 다만,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 숙제가 얼마나 서로에게 골칫덩어리였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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