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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30. 2019

#25 지적하지 말고, 지적하지 않게 만들자

전편: #24 숙제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

https://brunch.co.kr/@simon1025/44



숙제를 줄임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은 희미했다. 오히려 긍정적인 변화가 눈에 띄었다. 아이들의 생활에 여유가 조금씩 찾아오는 듯 보였다. 숙제 때문에 아침부터 울상인 아이들이 사라지고, 숙제를 베끼고 있다며 고자질 하는 아이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나의 정신건강에도 안정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동안 왜 그렇게 많은 숙제를 부둥켜안은 채 아이들과 씨름했는지 과거의 내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숙제 줄이기로 입증된 덜어내기는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주었다.


지적하지 말고 지적하지 않게 만들자

숙제가 많으니 지적할 것이 많은 것은 마땅한 이치였다. 같은 맥락으로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데에는 지적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적하지 않게 바꿀 수 있다면 바꾸어야 타당한 일이었다. 지적을 한다고 하여 크게 변화되는 것은 없음은 지난 우울한 날들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다.


먼저 교실에서 내게 스트레스를 주는 대표적인 것을 손꼽았다. ‘잡담’과 ‘생활 공책’ 이 2가지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통증이었다. 썩은 어금니처럼 하루 종일 내 신경을 건드리고 화를 불러일으켰다. 시급히 뽑아야 할 충치였다.


‘잡담’부터 손을 보기로 했다. 학기 초부터 강조했던 것은 경청하는 태도와 아침 독서시간의 정숙이었다. 잡담은 이를 방해하는 훼방꾼이었다. 꾸준히 지적하고 크게 화도 내보았지만 효과는 일시적인 때가 대부분이었다.


곰곰이 생각했다. 지적을 하지 않게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사실 예전부터 생각하던 방안이 하나 있었다. 우리 반의 책상 대형은 모둠을 구성하는 형태였다. 용이한 토의토론과 활발한 협력활동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토의토론과 협력활동에는 확실히 그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4명이 얼굴을 맞대고 있다 보니 때를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주 많이 했다. 그 때에는 아침 독서시간과 내가 설명하는 순간, 친구가 발표하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면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간단했다. 책상의 대형을 바꾸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나는 스스로 남다르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모둠책상을 통한 자유로운 상호 의견교환이 이루어지는 교실이 4차 산업혁명시대에 걸맞은 미래교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적을 할 상황을 도출시킨다면 과감히 변화를 추구해야 했다.


책상대형을 바꿨다. 모둠을 구성하는 형태가 아닌 짝꿍을 지어 칠판을 바라보는 형태였다. 많은 교실에서 취하는 책상대형이었다. 이번에 아이들의 반응은 각각이었다. 모둠을 풀어서 싫다는 아이들, 오히려 좋다는 아이들, 별 상관이 없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인가는 두고 볼 일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특히 아침 독서시간에의 변화가 도드라졌다. 완벽하게 아침 독서시간 시작과 함께 정숙의 신호탄이 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서시간입니다.’ 한 마디면 충분했다. 예전처럼 중간 중간마다 지적을 해가며 정숙을 상기시킬 필요도 없었다. 아침 독서시간의 분위기가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수업시간에서도 잡담이 줄었다. 100% 완벽한 경청을 하진 못하더라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상호 의견교환이 필요할 때면 그때그때마다 책상대형을 바꾸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굳이 하루 종일 모둠 대형을 유지하고자 한 것은 순전히 나의 고집이었다. 나 스스로 스트레스를 자초하고 있었음이 또 한 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다음 차례는 ‘생활 공책’이었다. ‘생활 공책’을 통해 받는 스트레스는 크게 3가지였다. 첫째, 생활 공책의 내용을 대충 쓰는 것. 둘째, 생활 공책을 구깃구깃 보관하는 것. 셋째, 생활 공책을 쓰느라 하교가 늦어지는 것. 역시나 지적을 통해서는 도저히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문제는 생활 공책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덜어내기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생활 공책의 내용이 너무 많았다. 내가 생활 공책을 매일 쓴다고 하여도 성실하게 꼼꼼히 작성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몇 몇 아이들을 불러 솔직하게 물었다.


“긍정메시지 쓰는 게 너희들한테 도움이 되는 것 같니?”


아이들은 대답했다.


“솔직하게 잘 모르겠어요.”


생활 공책의 내용을 대폭 뜯어 고쳤다. 그저 내 욕심으로 채워 넣은 것들은 버렸다. 정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아이들도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만 남겨두었다. 동시에 의무였던 항목들을 권장으로 바꿨다. 안 하면 점수를 깎기보다는 했을 때 점수를 주는 시스템으로 고쳤다. 첫째, 셋째의 스트레스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전보다 가벼워진 생활 공책을 성실하게 썼고, 일찍 썼다. 당연히 지적과 함께 나의 스트레스도 줄었다.


생활 공책을 구깃구깃 보관하는 것은 좀 더 고민이 필요했다. A4용지를 양면으로 하여 쓰다 보니 대충 책상 서랍에 처박혀 있다든지 분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L자 파일에 온전히 정리하는 아이들은 소수였다. 제본을 생각했으나 예산이 없었다. 그러다 샤워를 하던 와중에 돌연 아이디가 번뜩였다. 생활 공책 12장을 스테이플러로 묶었다.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A4용지 1장과 묶인 12장의 차이는 컸다. 이제 생활 공책은 온전히 보관되기 시작했다. 바닥에 흩날리는 일도 없었다. 더 이상 생활 공책을 구깃구깃 보관한다고 지적을 할 일도 사라졌다.


만세. 드디어 생활공책이 제자리를 찾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수많은 지적과 점검을 통해서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던 녀석이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변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차츰 나아지겠지 하면서 스트레스를 마냥 참았던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음이 아프게 다가왔다.


잠시 떠올렸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날리는 없는 법이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데에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굴뚝을 탓할 게 아니라 아궁이의 장작을 없앴어야 했다. 덜어내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여전히 교실은 나에게 시시각각 짜증나고 스트레스를 주는 장소였다. 그러나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지만 이제야 제대로 된 숟가락을 떴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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