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가 욱껴
23년 1월 서랍 속 22년 상반기
아기가 20년 구월에 죽고 그 해 가을, 겨울 나는
옷을 많이 샀다.
속이 허할 때 사람은 소비행위와 물건으로 그걸 채워보려는 패턴을 보인다지만, 자식 잃은 사건 뒤 옷가지를 사제낀다니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일이다.
내가 항암 중이거나 팔다리를 잃었다면, 옷은 사지 않았을거다 라고 생각했다.
말인즉슨, 이 돌연사를 겪으면서 화상 입은 맨살로 헐벗고 다니는 것 같이 아파도
이것은 타인의 죽음이다. 다행히 나의 죽음도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뇌와 내장들이 기능을 다할 때까지는 사용할거다. 조급해하지 말라,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동안 두 어린 것을 길러내야 하고 이왕 죽을 바에 좋은 기억으로 내 시간을 칠갑하고 싶다. 도파민 생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싶다.
매일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밀어넣고 그제야 질질 울며 사무실로 뛰어가면서, 위와 같은 다짐을 되뇌이곤 했다. 나도 죽는다, 잘 살자.
그러나 ‘살아있는 게 치욕스럽다’는 말도 내 뇌에 같은 에너지와 크기로 존재했다. 이 두 가지 상충된 마음이 범벅되어 격하게 껴안은 탓인지, 그야말로 사는 일이 부끄럽고 자신감이 없는 상태에서 도파민을 욕심내니, 엉뚱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 엄청 의식됐다.
세상에서 제일로 치는 고통을 겪은 사람이, 그리고 죽음을 일상으로 인지한 판에, 기껏 다른 사람들
눈이 신경쓰인다고? 이제와서? 남편은 나를 어이없어 했다.
자식 앞세운 에미. 이 프레임에 먼저 갇혔다. 내 애끓는 슬픔과 별개로 다른 사람들이 내가 겪은 일로 저들끼리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걸 생각하면 몸이 쭈뼛 섰다. 죽지도 않는 사회적 자아 때문에 자기모멸을 더하면서도, 어쩔 수도 없이 몸이 경직됐다. 저들끼리도 저들의 사회적 위신을 생각하여,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새끼 잡아먹은 년이 됐을까 라고 입밖에 내진 않을지언정, 팔자 사나운 년, 불쌍한 년, 걔 이제 어떻게 사냐 라고 태그하고 내 불행이 그들에게 옮겨붙지 않도록 거리두려 하겠지.
수치심을 외면하고 싶을 때 내면의 힘이 없는 사람이 손쉽게 하는 짓은, 겉떼기 옷에 열을 올리는 것이었다.
겉모습이나마 번듯하고 싶어. 쑥떡거리는 사람 뿐 아니라 날 얼핏 본 사람도 눈치챌만한 구겨진 영혼이 표시나지 않게.
때는 바야흐로 주식으로 모두 해피하고, 코로나 보복심리라 이름붙은 돈들로 백화점과 쇼핑몰들이 최고매출을 경신하던 때이다.그 샴페인 틈바구니에 끼여 나는 쇼핑에 몰입하고 결제했다. 아들도 죽지 않았으면서 롤렉스 금시계를 산 회사동기가 미웠다. 내가 사야 하는데.
21년 9월 출산을 하고 그 해 연말까지는 아주대병원 외래가 주요한 루틴이었다. 3개월동안 12번 가고 2차례 입원 했다. 대기실에서 아기를 안고 있자면 종종 산소통까지 동반한 중환자들이 실려 왔다갔다했다. 나는 사사건건 내 불행에 남의 불행을 견주며 안도하거나 분을 내던 시절이기에, 매주 대학병원에 가서 중환자들을 마주치는 일은 아주 괜찮았다. 나는 아직 시간이 있다, 에 더불어 지척에 있는 죽음에 대한 상기.
아니다. 그보다 직접적인 효과는 친정 엄마가 집안일을 도맡아 줬기 때문이었겠지.
더는 엄마가 내 집에 오지 않을 즈음,
남의 고통을 자꾸 수집하며 크기를 재려하는 나 자신이 역하다 여길 즈음,
‘회복탄력성’ 같은 썸네일을 지나치지 못하고 혹시나 하며 재생시키고 닫고,
‘내가 그 날 외출하지 않았으면 아기가 죽지 않았을텐데’라고 굳건히 믿으면서도 백일된 새 아기를 두고 다시 바깥을 쏘다니고 싶다는 마음에 날 돌로 치고 싶을 즈음,
22년 1월 나는 논현동에 있는 작사학원에 등록했다. 주1회 토요일 수업이었다.
배경은 이러했다.
유투버 ‘아는변호사’ 말하길, 우울(과거에 붙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할 땐 창의적인 일을 해얀다는 것이다.
그 클립은 처음 21년 9월 산후조리원에서 본 터라 당시에는, ‘빵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잖아?’ 소릴 들은 거 같아 조소했는데 그 얘기가 뇌에 눌러붙어 있었다. 그리고 3개월 뒤, 아기가 무던히 자라고 먹고 자는 패턴이 생겼을 즈음, 나는 그 말에 명분을 실었다.
아기가 두어시간 낮잠 자는 사이에 나는 좀 슬펐다. 아기가 낮잠 자는 게 슬픈 게 아니라, 미뤄뒀던 슬픔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경미한 슬픔. 이제는 남편한테도 이해받지 못할 꼬리가 길고 윤곽도 뭉개진 슬픔. 그러나 지난해 내내 컨트롤 당하느라 한번도 전체를 드러낸 적 없던 가여운 슬픔. 정오에 땅에 내려앉았다가 두시간 뒤 혹은 그보다 이르게 갑작스런 아기 울음소리에, 불륜남처럼 매번 옷도 다 못입고 하겁지겁 사라져야 했던 나의 슬픔. 정오의 해처럼 슬픔의 기운이 강할 때, 자는 아기를 내려다 볼 때 나는 여러차례 생각했다. 너를 임신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세상 사람들의 경멸을 살 나의 슬픔. 내 팔자, 내 정체성, 내 시간의 대주주, 낫지 않는 변비같은 나의 슬픔.
시간의 지분을 전혀 새로운 일에 주고 싶었다. 무언가 만들어내는 과정도 부담스러웠지만, 슬픔의 고기압에 눌려, ”형이 죽어서 너가 필요했어.“ 따위를 입밖에 내기 전에 슬픔을 관리해야 했다. 슬픔을 더이상 산소 노출하면 안되.
아기 백일상 보다 더 많이 고민했다. 어떤 장르의 창작? 그래서 고른 게 작사였다.
다른 창작은 모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 했고, 장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곡을 만들든 흙을 빚든 간에, 결국은 내 얘길 투영할텐데 그건 너무 역했다. 작사는 납품한다는 것이 제일 매력적이었다. 이 과잉된 자의식이 껴들 자리가 없다. 데드라인이 있다. 곡에 맞는 노랫말을 입힌다. 타겟층의 생활양식에 부합하면서 그보다 살짝 더 까리하게. 4세대 아이돌, 실시간top100을 디깅할 욕심도 있었다. 현시대의 케이팝 권위도 마음에 들었다. 아, 나도 한 자리… 명예욕이 다 올라왔다.
결론적으로 나는 작사학원 6개월 수강 뒤 다 관뒀다. 학원 10개월 수강 뒤 엔터회사로부터 15차례의 데모를 받는다(채택될 경우 데뷔)는 게 학원 설명이었고, 데뷔의 불투명성과 데뷔 이후에의 불투명성은 다 차치하고, 매주 한 곡씩 숙제해내는 게 너무 고되서 관뒀다. 4음절 맞는 영단어를 찾는다고 집안일은 고사하고 끼니도 끊는 식이었다. 취향은 애초에 대세에서 멀었고 리듬감도 지구력도 혹평에 대한 무던함도 다 시원찮던 나는 그냥 인정하고 집어치우기로 했다. 결정적이었던건, 유퀴즈에 나온 '아나운서 겸 작사가 김수지' 편이었는데, 중2때 '얼짱클럽'을 썼다는 것(나는 중학생 당시에도 동하지 않던 감성의 영역이었으므로), 데모 300곡 이상을 reject 당했다는 것(낙방이 문제가 아니라 300곡 작업을 했다는 것 자체에 뜨거운 경외심이)두 지점에서, 아 이쯤에서 관두는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싶었다.
22년 가을은 어떻게 지냈었지?
이렇다할 일화는 없고, 기억을 쥐어짜내니 기껏해야 돈 쓴 일, 돈 쓰고 생색안나서 열받은 일, 돈 땜에 남편 시비건 일뿐이다. 상반기는 매주가 하나의 팝송으로 메모장에 남아있는데.
마음 부침없이 고루하고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 vs. 물리적인 시간 흐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집중하고 도파민 폭발해봤으면 하는 마음이 아직도 충돌하며..뭐 여태 이렇게 포기가 안되는지 나도 내가 욱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