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났다. 근데도 어쩔 줄을 모르고.
지난 여름 처음 브런치에 내 얘길 쓰고자 했던 시점에는, 과거를 과거의 감정으로 기록하여 해소하고 현재를 고민하면서 여생을 단도리해가며 살자, 그런 의지가 있었다. 그 시점에는 복중 태아도 있었으니 앞으로 삼년은 몸이 고되지 않을란가, 그리 살다보면 몸도 기억도 감정도 닳고 삭겠지 그런 기대가 있었다. 그런 단편들도 기록해야지. 아등바등 사는 거. 그렇게 새끼들에게 헌신하면서, 돈도 벌고 아닥하고 살다보면, 어느날 갑자기 사고 혹은 투병 끝에 내 의식도 꺼질 날이 오겠지. 그게 칠년 뒤 일 수도 있고 사십 팔년 뒤일 수도, 다음달일 수도 있겠지. 그러니 죽은 자식 기억에 매어있기 아까운 시간이다.
그러나 이런 다짐은 조루와 같았다. 외상환자 손에 쥐어진 모르핀 스위치처럼 나는 시간 단위로 이 다짐을 누르고 또 눌렀다.
불행은 내게 어떤 모양새냐면, 볕 좋고 공기 좋은 태평한 어느 날 ‘어, 이 정도면 살만한데? 괜찮은데?’ 라고 자족하는 순간 뒤에서 느닷없이 내리치는 각목같은.
‘나 정도면 평균 혹은 그 이상 인생 아니야?’라며 깝죽될 때 누가 너더러 안심하라 그랬느냐며.
불행에 대한 이런 묘사는 글로 많이 보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절절히 알게 되었다. 이러하니 또 예고없이 불행이 덮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불안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몸으로 알게 되었다.
출산 전후로 브런치에 기록할 요량이었으나 결국 하지 못했다. 너무나 불안해서였다. 그 불안을 글로 옮긴답시고 감정을 펼쳐 들여다 볼 자신이 없었다. 뭣보다 불안이 너무 커서 새생명에 대한 기대가 없다시피한 데 대한 자각이 괴로웠다.
의사가 내 회음부와 허벅지 핏줄을 보고 과다출혈 리스크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나는 수혈받다 의식이 옅어져 가는 상상을 하느라 죽은 자식 슬픔을 잊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출산하다 죽을 수 있다고 받아들였다. 이성은 오바육바라고 아우성쳤지만 그 불안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내가 죽을 거라고 인정해버리는 것으로, 불안을 이유로 돌발행동 하지 않고 근근히 살았다.
조리원에서도 기쁨에 대해 쓸 수가 없었다. 기대와 의지와는 달리, 잠에 드느라 눈꺼풀을 가누지 못하는 아기 얼굴을 직면하니, 아기가 숨이 꺼져가던, 숨이 꺼져가는 줄도 나는 몰랐던, 그 표정과 꼭 같아서, 고통이었다. 태어난 아이에게 이미 미안했다. 새로 태어난 자식이 죽은 자식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죽은 자식이 너무 애달퍼 산 자식 자리가 없었다. 산 자식에게 젖을 물리면서도, 내가 그 산후도우미를 집에 들이지 않았더라면, 그 날 그리 길게 외출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날 그 망할 간염주사를 맞히지 않았더라면,.. 간신히 덮어뒀던 ‘-했더라면’ 가정문들이 줄줄이 끄집혀나왔다. 멍청하고 안타까운 일인줄 나도 알고있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같은 불안도 있었다. 아기는 태어나서 엉덩이 딤플과 뒤통수 혈관종 때문에 초음파검사를 했다. 그리고 접힌 발다리는 뼈 자체가 이슈로, 펴지지 않았다. 아이가 뱃속에 있었을때는, 과정이 고될지언정 교정하면 된다,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하고자 했는데, 말려올라간 다리와 구부러진 발을 손으로 만져보자니 혹 이것이 염색체/유전자 이상의 하나의 발현이고 더 큰 이상이 있는 것 아닌가 불안해하는 것으로 발달장애 정보를 전전하며 산후조리 기간을 채웠다.
아기는 생후 49일차에 전신마취를 하고 아킬레스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 이전까지 계속 양발에 무거운 석고 붕대를 감고 살았다. 갓난 아기는 이것이 인생인줄 알고 있겠구나, 제 체중의 10프로보다 무거운 석고를 감고 잘 버티는 아기가 나의 불안을 어리석다 꾸짖어주었다. 그럼에도 평온히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노라면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기라서 전신마취할 수 밖에 없어요. 조금도 움직이면 안되니까요. 걱정되시겠지만 마취로 잘못될 확률은 천명 중 한명밖에 안되요. 저는 제 자식이라면 당연히 수술시킵니다. 다른 옵션은 없어요.”
전신마취 외 다른 방도가 없냐 물으니 담당 소아정형의사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의사가 말한 천분지 일의 확률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박복한 내 팔자는 당연히 천명 중 한명이 될 거 같아서 불안해 미칠 거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수술도 한 번 미뤄졌다. 본래 생후 42일차 수술이 예정되어 입원까지 했으나, 입원 전 1주일부터 수술예정 시간 임박까지 4차례 채취한 혈액이, 혈중 내 칼륨 수치가 높아 마취 시 심정지가 올 확률이 있다는 것이다. 재수술 일자를 잡고 우리는 하루밤을 새고 퇴원했다. 남편은 입원당일에서야 혈액검사 결과를 알려주며 밤새 아기를 고생시킨 대학병원을 탓했으나, 나는 압타밀 분유의 비교적 높은 칼륨 함량을 확인하고서, 아 그래서 둘째가 수면제에 칼륨이 반응하여 죽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이 대항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이 내게 또 생길거다라는 높은 불안은 여러모로 나를 좀 먹는다.
할 수 있는 한 대비하고 조심하며 살 거 같지만, 그러질 못하고 무기력감이 압도하고 사는 일에 자신감이 없다.
활달한 딸애가 덤블링을 뛰며 자길 봐달라고 소리칠 때, 눈물 나게 아이가 예쁜 동시에, 이 아이를 먼저 보내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눈감고 일자로 누운 딸애 사체, 차가운 살 느낌이 뇌에 떠오른다. 그 이미지를 걷어치우느라 아이를 꽉 껴안으면서, 아이에게 뭔지 모를 불안이 옮겨갔을까 자괴감이 든다.
다른 이들에 대한 열등감이랄까, 피해의식, 아니꼬움은 어찌 처치할런지. 가족의 건강이 걱정이었던 적이 없어본 사람들, 내 커리어, 피부 노화, 아이의 수학 성적, 시모의 모진 말, 허비해버린 항공 마일리지 따위가 고민인 타인의 일상에 극렬한 분노가 일곤했다. 아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무턱대고 밉기도 했다. 하루밤 사이 애굽의 모든 장자를 거둬가버린 모세의 재앙이 오늘 일어났으면 생각하기도 했다. 새 자식이 태어났는데도 말이다. 친구들과는 세 번 정도 만났나… 그들의 호의는 마음에 남지 않았고 나는 그들을 만난걸 후회하며 귀가했다.
남편은 내가 불안과 우울감 자체에 몰두한다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했다. 그럴 때면 남편에게 인간적으로 실망이 든다. 조소가 나온다. 남편은
회사서 숨이 안쉬어진다며 몇개월 약을 먹었고 셋째 출산 전주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걸 충분히 아는 양반이, 남들도 눈치껏 안할 말을. 말이랍시고. 속이 뒤집힌다. 당신이나 당신 잘 간수하고 살어. 어따대고 긍정 운운이야. 대개는 삼키지만, 남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느낄 것이다.
이전에는 아기가 귀신으로라도 내게 와서 얘기해주길 기다리며 열린 방문 바깥 불빛을 보며 새벽을 지내고는 했는데. 지금은 찾아올까봐 불안하다. 너무 미안하다. 부탁까지 할 거 같기 때문이다.
엄마가 살려고 애써서 미안해. 동생만 애지중지 밤낮으로 안아줘서 미안해. 너가 동생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데…해치지 않았으면 하는데…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죽은 아이를 생각하니 불안도 불행도 알량해진다. 내 인생을 생각하느라 잃는 게 싫어서 불안한게지.
죽기밖에 더할라고. 다들 죽을거고. 이리 삶에서 뒤꿈치를 들며 간격을 벌리면, 우습게도 평정심으로 균형을 찾아가며 생활이 굴러간다. 이따금 욕심도 생기고. 자식같은 거 부채같이 느껴지고. 자식 버리고 집나간 여자를 백번천번 이해할 수 있다 느껴지고. 그러다 애가 열이라도 나면 다시 혼비백산할테지만.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