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가루로 남는 동안
부검 다음날은 화장이었다.(2020/09/29) 추석 공휴일을 목전에 둔 마지막 평일이었다.
첫째가 콧물로 코가 막히는 기미가 있어 아침 일찍 소아과에 들르고 싶었으나, 아침에 갈만한 아는 소아과가 아기가 B형간염주사를 맞은 소아과 뿐이고 마음도 어수선하여 그냥 아이를 어린이집에 떨궈놓았다.
그때까지 내집에서 우리 부부 끼니를 챙겨주던 엄마는, 죽은 자식 화장터에 가는 내 옷가지까지도 챙겨줬다.
병원 안치실 직원은 망자에게 입힐 깨끗한 옷도 하나 챙겨오라고 했었다.
그냥 형식적으로 듣고 넘기면 될 일을, 순간 그 말이 너무 시답잖게 느껴졌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살과 장기가, 다 해체되었다가 간신히 봉합된 상태일텐데 그 사지를 이리저리 들어올려 배냇저고리에 죽은 살을 꿰어넣는다는 게 아연했고,
우리 아기 깨끗한 옷 입혀 좋은 곳으로 잘 보내줘야지- 이런 정돈된 마음은 결코 들지 않았다.
어떤 인간은, 죽을 때 좋은 구두를 신고 관 속에 들어가도록 가족에게 부탁할 거라고, 어떤 인간은 무엇이 좋은 구두인지 알만큼 살고도 관 속 사정까지 욕심을 내는데, 아기가 살아보고 맛보지 못한 인생이 한스러워 '깨끗한 옷' 이 너무 부질없게 들렸다.
다시 그 병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니 황망했다. 이미 숨이 끊긴 아기를 조심히 안고, 꼬박꼬박 신호와 속도를 지키며 그 주차장에 들어섰던 그 며칠 전 새벽.
그리고 같은 병원에서, '사정을 들은 수녀님이 이것은 할인해드리라고 했다'며 장례식장 직원에게 관이며 시체 보관 비용 설명을 듣고 있었다.
장례식장과 안치실 사이 대기 의자에 넋놓고 앉아있자니 시시때때로 유가족 무더기가 와르르 울음을 쏟았다 사라지고는 했다. 그 때 나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심정으로, 이순간 핵폭탄이 터져도 여한없단 마음과 화장터까지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몇시에는 출발해야 하고 첫째를 하원시키려면 몇시에는 화장터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시간 셈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 엄마, 나 배고파.
대기 상태를 못견디고 나는 친정엄마까지 일으켜 세워 응급실 옆 편의점엘 갔다. 환자복을 입고 이런 저런 주전부리를 먹고 있는 환자를 보니 너무 부러웠다. 우리 애도 입원했으면 죽지 않았을텐데.
- 내가 아주대 가라고 했는데. 남편 앞에서는 이 얘기 하지마.
나는 계속 '-했으면 죽지 않았을텐데' 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안치실 직원이 아기 옷을 갈아입혔다고 인사하라고 했다. 나는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보고싶었지만 볼 낯이 없었다. 내가 망설이자 엄마가 막아섰다. 넌 들어가지마.
엄마와 남편이 들어갔다 나왔다. 엄마가 사진찍어왔다고 했다. 나중에 보고싶으면 보여주겠다고.
아기 천사와 무지개가 그려진, 파스텔 톤으로 색칠된 작은 관을 우리 차 트렁크에 싣고 남편이 운전을 했다.
화장장은 우리 가족이 주말마다 산책가던 공원 옆이다.
친정아빠와 동생내외, 시어머니, 시누이를 만났고 할말은 없었다. 데스크에 곱게 코팅된 유골함 가격표에 대해 남편과 우스개 소리를 했었나.
텔레비전 화면으로 파스텔 관이 불구덩이로 들어서는 걸 보면서, 수순에 따라 추모예배를 보았다. 찬송을 부르는데 아버지가 저편에서 어깨를 떨며 소리내 흐느꼈다.
마음에 닿지 않는 찬송을 꾸역꾸역 부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뭘 위해 이러고 있나? 좀 역했다.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고서도 하던 패턴을 계속 하는거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자리한 젊은 목사는, 아기의 돌연사를 겪은 다른 아빠의 이야기 "너의 사명을 끝내고 갔다는 것을 아버지 인생을 통해서 반드시 증명하겠다" 에피소드를 전하며 아기의 사명과 남은 부모의 사명을 성경구절과 함께 전했다.
이 예식을 관성으로 애써 넘기고 있는 내가 반발심이 들락말락했다. 나는 내 새끼가 나의 업보이길 바랬지, 내가 깨닫지 못한 사명 때문에 목숨을 희생하고 왔다갔다니. 하나님 아버지시여, 같은 부모로서, 그냥 내가 싫으면 나한테나 벌을 주지, 내 마음 찢어지는 고통이야 성공했다 치고 희생된 아기는 무슨 죄입니까. 다 당신 자원이고 내가 줬다 뺏는 목숨이라 이겁니까.
예배가 마치고 목사는 성큼 남편 코앞까지 오더니 말했다. "너무 죄책감 갖지 마세요."
남편이 대꾸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말에서 화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화는 엄마를 향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엄마를 쫓아가,
- 엄마, 목사님한테 남편 얘기했어? 아주대 얘기 같은거?
- 아니.
- 근데 죄책감을 갖지 말라니 어쩌느니 그런 말까지 거들어? 뭘 안다고? 애도 사명에 불 탄 희생양 취급이더니?
엄마도 화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나보다. 그 일을 겪고도 하나도 순종하지 않는다고, 엄마는 나의 화를 본인 화로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더 큰 목소리로 연화장 복도를 울리며 화를 냈다.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새끼 화장터에서 엄마에게 못된 년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자니, 순간 엄마가 걱정되기도 했다. 엄마도 제정신 아니네. 사돈도 있는데.
아버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단숨에 불붙은 이 악다구니가 어처구니가 없다면서.
온가족이 창문에 붙어 서서 직원이 불구덩이에서 나온 유골 가루 사이에서 나무토막을 골라내고 가루를 상자에 담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추모예배에서 내가 느낀 바를 애 아빠와 공유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그도 "아버지 인생을 통해 반드시 증명하겠다" 식의 맹목성을 갖는다면 속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빙자한 나의 이기심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와 부부라서 동질의 냉소와 체념을 갖고 있었다.
- (남편) 내 자식 장례식인데 왤케 집중이 안되냐.
그리고 우리는 몇 장면을 희화화하며 연화장을 떠났다. 차 뒷좌석에 앉은 시누이가 경악하든말든.
대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 어쩌면 우리가 부상입은 채로도 여생을 이럭저럭 살아낼 수 있겠구나 그런 안심이 들게끔 한 대화였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을 다 알지는 못했다.
-(남편) 그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는데, 엇, 나 죄책감을 느껴야되나? 당황했다니깐.
남편, 당신은 죄책감이 없단 말인가. 당신과 나의 안일함과 무지 때문에 죽은거야. 그걸 모른다고?
죄책감에 위축된 마음을 그 목사가 건들였을까봐 내가 그 악을 쓴건데, 당신은 죄책감이 없다고?
하지만 애정처럼 죄책감이란 감정도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