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
아래는 충북 진천문화원에서 와인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한 두 분의 질문을 받는 도중에 어느 수강자로부터 받은 질문의 요지이다.
"선생님, 우리나라는 핸드폰도 잘 만들어 전 세계에 내다 팔고 자동차도 성능이 좋아 수출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물건을 잘 만들어 내는 기술을 가진 우리가 와인은 왜 거의 다 수입에 의존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라는 질문이 와인 강의 후에 잘 나온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다른 글( https://brunch.co.kr/@simonepark/22 )을 통해 하였지만 진천에서의 강의는 또 다른 면에서 뜻이 깊었다.
진천군은 현재 다양한 변모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농업이 주가 되는 지역이므로 외래 농산품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2018년 가을, 수입 농산품의 대명사 격인 와인에 대한 강의 요청이 들어왔던 것이다. 이 요청은 '우리 농촌도 우리가 잘 만들지 못하는 와인에 대해 수입 농산품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구나'하는 느낌을 나에게 주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인 1988년으로으로 돌아가 일본 돗토리현의 도우하쿠읍에 사는 우마노 씨 댁에 놀러 갔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본다. 도우 하쿠도 진천과 마찬가지로 농업이 주된 산업인 농촌 지역이다. 사흘 동안 홈 스테이를 하던 둘째 날 저녁에 우마노로부터 "재미 난 강의가 있는데 같이 가보지 않을래요?"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그를 따라간 곳은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그 지역 문화원 건물의 10여 평 남짓한 강의실이었다. 우리는 약간 늦게 도착했는데 이미 그곳에서는 한 강사가 열댓 명 정도의 수강생 앞에서 와인에 대하여 열띤 강의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어라, 일본은 이 시골에서도 이런 류의 강의가 통하는가 보네! 참 대단하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문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강의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일본어 수준이 아니었기에 정확히 모든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그 강의가 내 생애 첫 번째 와인 문화와의 본격적인 만남이 되었다. 그 당시는 짐작도 못했지만 그로부터 제대로 된 와인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고 계속 빠져든 시발점이 된 것이었다.
지금도 그 강의에서 기억나는 한 컷은 '와인과 위도'의 관계를 보여주는 슬라이드이다. 와인을 제조할 때 사용하는 포도는 양조용 포도로 우리의 식용 포도와는 다르다. 이 양조용 나무를 포함한 포도의 재배할 수 있는 지리적 한계를 나타내는 세계지도였다. 잘 눈여겨보면 남북 와인 벨트 사이의 지역에서는 와인 대신 커피가 생산은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역시 강의 중에 이 지도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에서 돌아와 나름 혼자 마시다 보니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같이 공부도 하여 보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서적 한 권 없었으니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다름없는 시절이었다. 초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 프로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그때 막 은퇴하고 고향인 청주로 돌아온 한 축구선수가 알려주는 기초 상식을 '와아, 대단하네.' 하면서 머릿속에 집어넣던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와인 이야기가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알라딘과 이상한 램프 이야기'나 '신드바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시절이었다.
천 년 전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몇몇 선조들이 중국에서 막 돌아온 유학생으로부터 외래 문물을 접하며 신기해하고 재밌어하던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