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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Jan 11. 2022

리처드 기어가 되어 보나 부다.

콩트



토요일 오후.

12월 중순이 되니 기온이 영하 가까이 떨어졌다. 머리 손질하기에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올해의 버킷리스트였기에 큰맘 먹고 동네 미장원엘 갔다. 자르거나 감으러 가끔 간 적은 있어도 파마하러 가기는 처음이었다. 갈 때마다 항상 '시간이 나면 펌을 하러 오겠습니다.'라고 미용사에게 공언을 했던 터였다. 

"파마를 어떻게 해드릴까요"

"오래 가게 해 주세요."

딱 한 마디씩 주고받고는 그녀의 처분에 맡겨 버렸다. 


파마하는 날이라 그랬지 보통 때 같으면 이런 대화가 이루어진다. 

'어떻게 깎아 드릴까요.'

"한 달 후에 지금 모습이 되게 깎아 주세요."

그러고 보니 머리를 만지는데 헤어 스타일 보다 시간에 방점을 찍어 온 모양새다. 


미용실 체어에 앉아 일단 모든 것을 맡기고 나면 이제부터 내 의지와 무관하여 오히려 더 자유스럽다.  

방금 전에 다른 손님이 앉았던 자리라서 그런지 미용의자는 의외로 따뜻하고 안락했다.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의 좌석에 몸을 누인 듯 편안하니 머리를 말아내는 내내 잠이 쏟아져 꾸벅꾸벅 졸았다.


무료함과 벌인 혈투 끝에 펌이 완성되어 맹물로 씻어냈다. 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말린 순간 나타난 거울 속의 남자는 두 시간 반전의 내가 아니었다. 산발을 하고 있던 독거노인은 간데없고 멋진 컬의 배용준이 입가에 미소를 함빡 담고 들어앉아 있었다. 

'그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이토록 이쁜 머리칼로 바꿔 주다니!' 난 정말 미용사에게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몰랐다. 특유의 매캐한 가스와 골치 아픈 파마약 냄새를 맡으며 견뎌낸 두어 시간의 사투死鬪가 일생일대의 보람으로 되돌아온 순간 나는 펌 요금 25,000원에 팁 10,000원을 얹어 거금 35,000원을 썼다.



일요일 오전.

"리처드 기어 같아요. 거 왜 영화 '뉴욕의 가을'에 나오는 주인공의 머리 스타일 그대로이네요."

아침에 골프장에 갔더니 접수 보는 직원이 나에게 기분 좋은 인사를 보낸다.

"아니, 난 어떤 배우가 걸어오는 줄 알았어. 박원장, 아주 멋있어졌네 그려.."

동반하여 라운드 할 친구가 만나자마자 또 덕담을 건넨다.

'사람 맵시는 머리가 9할'이라는 속담도 있지만 바로 전 날 미장원에서의 '펌 permanent' 한 번으로 이렇게 자자하게 칭송을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튼 그날 저녁 라운드를 마치고 바쁜 척 수작을 떨며 동반자와 의례히 함께하던 샤워를 마다하고 혼자 먼저 나왔다. 왜냐하면 파마약을 너무 빨리 씻어 내면 머리가 오래 못 가기 때문에 하루를 버텨내고 월요일 아침에나 머리를 감을 요량이었다. 미용사가 적어도 일요일 저녁에는 샴푸를 해도 된다 했지만 하루 더 견뎌 웨이브가 더 오래 살아준다면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를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



일요일 밤.

골프장을 나서자마자 꿉꿉한 머리를 한 채로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로 문안차 내려갔다. 하지만 연로하신 어머니는 나의 우아한 변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다.

기껏 잘 만들어놓은 웨이브를 혹시나 다칠세라 베개를 한껏 목 아래로 고이고 가만히 누워 자는 나에게 대신 한 말씀하셨다. 

"모처럼 오더니 잠자리가 무척 불편한 모양이구나!"  



어려서부터 머리만큼은 길게 기르고 싶었다. 초중고 학교 다닐 때는 멋대가리 없는 교사들이 기르지 못하게 막아섰고 대학 시절에는 못돼 먹은 일부 정치군인들이 총칼을 들이대고 훼방을 놓았다. 꽁지를 매든 상투를 트던 누구 하나 시비 걸 자 없는 좋은 세상이 겨우 왔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머리카락이 따라 주질 않았다. 너무 가늘어져 자라면 자랄수록 뒤섞이며 사방에 거푸집을 지었다. 가만가만 걸어도 제멋대로 휘날려 눈을 찔러 대니 견딜 수가 없었다. 옛 말에 '머리가 검고 굵으면 사주팔자가 나쁘다'라고 한다지만 돼지 머리털을 가진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런 나의 불평불만에 미용사의 처방은 파마였다. 그렇게 시작된 미장원 출입 역사가 올해로 삼십 년이 되었다. 1983년 본정통-청주시 중심 도로의 일제식 과거 이름으로 현재 명칭은 성안길.-에서 처음으로 '김정일 스타일 파마'를 해 본 이래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지금은 남자가 미용실에서 머리 자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지만 내가 처음 미장원 출입할 당시는 극히 드물었다. 몹시 쑥스러운 일이라 간호사를 대동하고 가기도 했다. 그나마 그 시절에는 머리카락에 힘이 있어 노력의 대가를 충분히 보상받았지만.  



월요일 아침.

밤새 머리가 가려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뒤척거리다 새벽에 일어나 다시 한번 거울에 비춰 보았다. 

'아! 나의 멋들어진 머리 컬 curl!'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샤워는 늦게 되도록 좀 더 늦게, 샴푸액은 적게 되도록 좀 더 적게 사용하며 머리를 감았다.

그런데...

쫌 이상했다. 물론 미용실 출입 수십 년 경력이므로 파마한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있을 때는 컬이 살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쫌 수상했다. 주변머리에는 컬이 조금 살아 있는데 앞머리엔 웨이브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내내 걱정을 하면서 조심조심 드라이를 끝내고 거울을 보니 아뿔싸 그렇게 어렵사리 획득했던 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무성한 잡초만이 부스스 내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사흘도 못 가 리처드 기어고 뭐고 다 달아나고 크나큰 충격만이 내 머릿속에 들어앉았다.

겨우 이틀 천하였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념사진이라도 찍어둘걸...



월요일 저녁.

머리 때문에 하루 종일 아무리 기분이 상하고 슬퍼도 먹고살려면 저녁에 평생교육원 '와인 스피릿' 강의는 해야만 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스무 명의 수강생 중 아무도 '내 머리'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마 속으로 '저 양반 오늘도 또 봉두난발蓬頭亂髮, 머리도 빗지 않고 산발散髮로 나타나셨군'라고들 생각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실인 것을...



그로부터 며칠 후

시간이 약이라고 이제는 충격이 좀 가셨다. 미장원에서는 다시 파마를 해 주겠다 했지만 내 불쌍하고 연약하고 헐벗은 머리칼을 생각하면 아무리 멋지고 멋진 머리컬을 또다시 준다 해도 올 겨울에는 사양할 생각이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보호하려면 당분간 파마약을 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아까워 머리를 감은 후 수건을 흔들어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고 수건에 머리를 대고 살살 움직여 말리는 나에게 더 이상의 파마는 독배毒杯일뿐이다.

이런 불쌍한 나에게 누군가 좀 성배를 전해줬으면 감사하겠다. 

빳빳하게 곤두서게 하는 그런 처방이 있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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