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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J Jul 29. 2024

사직, 그 후

[우울증 환자 생존기] 일상 달래기

사직 후, 한달은 프로젝트 두 가지에 참여하느라 조금 바쁘게 지냈다. 일이 얼추 마무리되고 이제 사흘 지났을 뿐인데 벌써 심심하다. 감기 때문에 일주일 넘게 골골거리면서 일기와 기도도 건너뛰면서 지냈다. 일상이 흐트러지니, 마음도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조금씩 밀고 들어온다. 불안이 조금씩 자라는 와중에 알았다. 내 일상이 흐트러진 것이 불안에 기회를 줬다는 걸. 그동안 많이 괜찮았다. 심지어 행복했다. 그런데 아주 조금의 틈이 생기니 다시 불안이 스물거리며 올라왔다. 어제 다시 일기를 쓰고 기도를 했다. 오늘은 산책을 하며 처음으로 '아버지!' 하고 하느님을 불렀다. 마음의 절실함이 '아버지'를 찾게 했다.   


브런치에 들어와서 첫 글로 우울증으로 힘들어 휴직을 거쳐 면직을 한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나보다 12살 어리다. 그에게는 시간이 좀 더 있다. 회복하고 사회로 돌아갈 시간. 지금 나에게는 어떨까? 나는 마흔 중반으로 특별한 전문직도 아니고, 그저 공공기관 재직자였을 뿐이다. 내게는 사회, 경제시장으로 돌아갈 경쟁력이란 것이 있는지 의문이고, 새로운 능력을 키우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현실에 조금씩 부딪히고 있다. 다만 나는 지금 회복이 많이 된 상태고 어쩌면 계속해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조금씩 가져보는 중이라는 것만이 조금 나은 상황. 


두 달이다. 그저 회사를 그만둔지 두 달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상황처럼 회사 다니던 때의 안락함이 떠오른다. 괴로웠지만 어쨌든 객관적으로는 안정적이었던 상태. 어쩌면 다시는 갖지 못할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에 어떤 고난이 왔을 때 나는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하는 실체없는 불안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며 재테크 책도 읽어보고 유투브도 찾아보지만, 그런 컨텐츠는 불안감을 더 건드리는 것 같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는 걸 직시해야 하니까. 


그래서 책을 든다. '향모를 땋으며'라는 책을 읽고 있다. 식물학자의 에세이인데 마음이 편안해진다. 불안감이 가라앉고 내가 있는 곳이 적막한 호숫가가 되고, 인디언의 세계에 초대된 기분이 들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현실도피인지도 모른다. 한 자라도 더 배워서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하는 시기에 한가롭게 도서관에서 빌린 이역만리 식물학자의 평화로운 에세이나 읽고 있는 것은 그저 지금의 나를 달래는 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럴려고 회사를 그만 둔 것 아니었나? 회사를 다니면서 근무시간에도 책은 읽을 수 있었으나, 한 자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이 마비된 상태로 하루 9시간을 보내고 지쳐서 돌아오는 것을 더 이상은 할 수 없어서 그만 둔 것이 아니었나? 편안한 마음으로 책이라도 읽어보고 싶어서 그만둔 것 아니었나?


스스로 내가 원했던 삶이라는 걸 자꾸 깨우치려 한다. 가지 않은 길, 혹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으로 지금 있는 곳에서의 감사함과 행복을 잊지 않도록 자꾸 정신을 가다듬는다. 사직 이후의 삶은 겉으로는 평온하기 그지 없다. 저번에 말한 것처럼 부자의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익숙해질수록 또 다른 변화를 꿈꾸게 된다. 남편과 함께 있는 것이 즐겁지만, 이제는 남편도 직장을 찾고 나도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재테크의 시간으로 보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시간은 정해진 대로 흐르는데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좀 걱정도 된다.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들. 이 시간을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그저 책을 보거나, 자거나, 멍 때리며 보내는 시간이 내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필요한 시간이었을까?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나타날 거란 생각도 한다. 여전히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주어진 안에서 꼼지락 거리며 하루하루 스스로 달래가며 보내고 있다. 


퇴사를 하면서 엄청나게 다른 삶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쳐 쓰러진 몸과 마음을 편하게 쉴 수 있기를 바랬다. 퇴사하고 그렇게 되었고, 나 혼자 그 시간을 보냈다면 온전히 편안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을 텐데 남편이 함께 해줘서 더 안정적으로 연착륙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투약도 빠르게 줄일 수 있었고, 상담도 기한을 늘릴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제는 다른 스텝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편도 취직하고 나도 좀 더 바쁘게 일을 할 시간, 혹은 진심으로 내 사업을 생각해봐야 하는 시간. 좀 빠른 재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간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성당의 성경 공부가 방학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쉬어가는 시간이다. 학교도 방학을 했고. 성경 공부를 하면서 사람들과 나누는 공부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나처럼 갓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보다 신실한 사람들이 많아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 그 중에서 "예, 여기 있습니다." 라는 답문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다"는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좀 더 낮은 자세로 지금 현재에 감사하며 주어지는 시간에 성실해야겠다 매일 다짐한다. 현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사직 이후의 삶 역시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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