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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J Jul 11. 2024

부자의 삶

[우울증 환자 생존기] 삶의 질이 좋아요

[우울증 환자 생존기] 라는 분류표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요즘 나의 상태는 양호하다. 불안도 우울도 없고, 폭증하는 슬픔도 분노도 없다. 평온하다. 낮에 복용하는 약을 줄이면서 수면제도 용량을 줄였는데 한 동안은 잠이 안 와서 고생하다가 몇 일 전부터 일찍 자고 아침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주아주 오랜만에 '어디 가볼까?' 라는 생각도 들고,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궁금해하기도 하고, 책도 읽고, 독후감도 쓰고, 산책도 한다. 무기력으로 늘어져 있던 날이 불과 얼마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홈쇼핑에서 아프리카 여행 상품을 팔고 있었다. 한 사람에 1500만원 짜리 상품이었는데, '회사 다니면서 저런 여행이나 다닐 걸 그랬나?' 싶다가 '아.. 나는 회사 다닐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아무데도 가고 싶어하지 않았었지'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랬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몇 년만에 '어디를 가볼까?' 싶은 생각이 든 거다. 얼마 전에는 충북 괴산에서 하는 '괴산어때? 한달살기'라는 프로그램에 응모 했다. 떨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충분하다. 


책도 넉 달에 한 권을 겨우 읽었었는데,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으니 남편과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남편과 나는 책 보고 산책하고 하루 한끼 우리 손으로 지은 밥을 해먹으며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 부자의 삶을 살고 있다. 누가 보면 돈이 엄청 많아서 둘다 은퇴하고 파이어족이 된 줄 알겠지 싶다. 어쨌든 작금의 상태가 둘다 퇴직하고 평온한 삶을 보내고 있는 건 맞으니까,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다. 이런 평온한 삶이 나에게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퇴직을 하는 그 순간에도. 몇 년을 회색구름이 잔뜩 끼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퇴직 후 한달이 지난 지금은 햇빛 쨍쨍한 여름 오후가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고 뉘엿뉘엿 황금빛 노을이 지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저녁이 매일 이어지고 있다.  


회사에 다닐 때도 내 연봉의 두 배를 버는 언니는 내게 "그래도 삶의 질은 너가 훨씬 좋아. 일도 빡 쎄지 않고, 워라밸 지키면서 살 수 있고, 남편도 있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라며, 내 삶의 질이 객관적으로 무척 좋다고 했었다. 나도 언니 말에 크게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일을 안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회사, 새로운 일을 벌리려고 하면 어려운 거 하지 말라고 말리던 회사, 모든 휴가를 다 챙길 수 있는 회사, 출퇴근이 편도 20분 밖에 걸리지 않는 회사,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철밥통 회사. 연봉은 낮고, 함께 하는 사람들 중에는 형편없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회사. 정신만 멀쩡할 수 있었다면 즐겁게 다녔을 회사. 하지만 나에게는 일의 성취감도, 나의 자존감도 지켜주지 못했던 회사.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들이 없어서 퇴사할 수 밖에 없었던 회사. 어쩌면 그런 회사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회사와 나의 생명 사이에서 나는 내 생명과 가족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기에 지금도 후회는 없다. 


퇴사를 하면 이걸 해야지, 저걸 해야지 하는 생각이 1도 없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 날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한 달 열흘을 보내고 나니, 몇 년을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평안과 뭔가를 하고 싶은 생각과 몸 상태가 돌아오고 있다. 앞으로의 일은 알 수가 없기에 모든 말이 조심스럽게 느껴지고,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늘, 이순간에 감사하다는 것 뿐이다. 


뜻하지 않게 남편과 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감사하다.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이렇게 빠르게 회복하며 지내지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까지 감사하지 못했을 거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들은 이야기 중에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시간 안에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겠거니 생각한다. 모든 것이 그 분의 뜻과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나는, 남편은 그 안에서 사랑받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감사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퇴사한 것은 내 인생에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퇴사를 고민하는 많은 우울증 환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만둬도 괜찮다고. 회사 때문에 힘들고 우울하다면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건져내야 한다고.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용기를 내 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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