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자의 삶] 공공기관의 기획자로 살다
나는 나의 일이 예술가의 기획자 뒤의 기획자라고 생각한다.
예술가 커튼 뒤의 기획자 뒤에 있는 속커튼을 하나 더 열어젖히면 나의 자리가 있다.
한 마디로 예술가와 기획자가 하고 싶어하는 걸 할 수 있도록 예산을 만들고 사업을 기획하고 판을 열어젖히는 것이 나의 일이다. 나는 이 일에서 큰 보람이 느낀다.
나도 한 때 예술가나 큐레이터를 꿈꾼 적이 있다. 하지만 이 길로 들어섰다. 지금은 모 자치단체 산하의 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같은 사람을 문화예술행정가로 부른다. 하지만 행정가라고만 하기에는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포스터를 붙이고 전단지를 돌려야 하는 일은 바뀌지 않는다. 은퇴할 때도 포스터 붙이고 있을 것 같다는 농담이 사무실에서 오간다.
나는 좀 독특한 케이스로 여기에 발을 들여놓았고, 문화재단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외국인 회사나 대기업 가서 좋은 콘텐츠를 골라보는 눈 좋은 커스터머가 되는 것이 삶의 질에 훨씬 도움이 될 거다. 인생 길게 보자."며 여럿을 돌려보냈다. 나는 이 일이 좋으면서도 싫다.
싫은 이유 한 가지를 대보라면 대표적으로 연봉이다.
나와 유사한 학력을 가진 기업계로 간 동갑내기 친구가 연봉 1억을 넘은지는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대기업 신입사원보다 못한 연봉을 받으며 그렇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무원 연금을 받는 것도 아닌 애매하고도 안타까운 경제적 처지에 놓여있다. 이 연봉으로는 한입 풀칠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나름 업력 20년, 공식적으로 15년이 넘었는데도 그렇다. 일이란 자아실현이라고들 하지만, 개나 줘버리라는 말이 월급명세서를 받을 때마다 튀어나온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못 떠나고 있다. 이 일이 좋기 때문이다. 누구를 욕하랴.
그래도 문화재단에 다니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는 충분히 기득권이다. 일단 정규직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관에 있고.. 또 뭐 그럴듯해 보이니까. 하고 싶은 분야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축복받을 만한 건 맞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일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왜 이리 안타까운지 모르겠다. 현실을 알고 들어오면 좋을 것 같다.
문화재단은 1년마다 예산을 짠다. 사업 기획을 하는데 이게 8월에 시작된다. 행정업무가 8월에 시작되니 늦어도 7월에는 다음 해 사업기획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 그 때부터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어떤 신규사업이 살아남을지, 어떤 사업을 지속할지, 어떤 사업이 선거와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당사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결국 신규사업 판을 짤 수 있는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나는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지. 신규사업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년에 이 재단에서 살아갈 이유가 있는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예산은 12월 시의회 의결 과정을 통과해야 끝이 난다. 그 사이에 시 주무부서(문화예술과 같은)와의 협의, 시 예산기획과와의 협의를 거치며 예산서와 기획서는 너덜너덜해지고 결국 하던 걸 계속하는 매우 보수적인 선택이 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되면 진짜 진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새로운 신규사업을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외부예산을 따오는 것이다. 공모사업에 참여해서 PT를 하고 열심히 거짓말을 해서(없는 걸 만들어내는 것이니 주로 나는 이걸 거짓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기를 치지는 않는다. 하겠다고 하는 걸 어김없이 해내고 더 좋은 새로운 것들을 해내니까.) 돈을 따오는 것이다. 국가기금도 있고 도기금도 있고, 민간기금이 될 수도 있다. 주로 문화예술정책 공모사업을 하니까 국도시비 중 하나가 되겠다. 선정이 되면 돈을 쓰는 시스템부터 정산보고를 하기까지 또 머리가 아프다. 세상 머리 안 아픈 일이란 없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염세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인데 기획자의 기획자 역할에서 보람을 느낀다니 뭔가 모순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사실이다. 내가 짠 판에서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새로운 창작물과 눈에만 보이거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기뻐할 때 함께 기쁘고 눈물이 날 정도록 울컥할 때가 있다.
한 은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게 딱 맞는 성격이다. 정말 잘 할거다."
그 에이전시가 이런 문화재단이나 국도시의 산하기관을 말하는 거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는데 십년이 지나서 에이전시와 에이전트의 뜻을 찾아보고는 음.. 뭔가 묘하게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문화재단 기획자는 에이전시와 에이전트가 아니다. 무언가를 대리해서 협상하고 그것으로 돈을 벌지도 않으며, 무언가 중개하는 역할이 아니다. 현장에서 내가 느낀 건 그렇다.
물론 정책전달체계에서는 에이전시라는 말이 맞을 수 있다. 결국 대리의 대리의 대리 역할을 하게 되니까. 하지만 현장의 문화기획자는 에이전트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왜냐면 기획의 키를 내가 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기초문화재단의 경우, 더 현장에 가깝기 때문에 에이전트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많다.
밖에서 정말 내 사업을 하게 되면, 이 시절을 다르게 말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