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0.1% 남편

[우울증 환자 생존기] 남편 고마워!

by 마담 J

연애할 때 차 안에서 공황이 왔다. 숨을 못 쉬는데 신랑이 등에 손을 얹어줬다. 괜찮냐며. 안정을 찾으며 이 남자랑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상담만 받고 있을 때라 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죽고싶어서 상담을 다닌다'라고까지 극단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남편은 받아들였고(남편도 뭐가 씌여있을 때라) 우리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함께 살면서 신랑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하는 나에게 늘 그러라고 했다. 없으면 없는대로 다 살아진다며. 하지만 그만 둘 수가 없었다. 회사를 그만 뒀는데도 안 괜찮아질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면 더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에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울증 환자에게는 루틴이 중요하다. 아무리 결근을 하고 지각을 해도 매일 똑같은 시간에 어디를 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그만 둘 수가 없었다.


하루는 신랑이 술이 약간 취해서 들어왔다.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너에게 행복을 가르쳐주고 싶어서 결혼했어.'라고 했다. 행복을 가르쳐주고 싶어서 결혼했다니. 프로포즈 안 했다고 기회가 될 때마다 구박하지만, 이보다 더 절실하고 진심인 프로포즈가 있을까. 몇 년이 흐르고 보니 정말 이 사람은 나에게 행복을 가르쳐주고 있다. 매일 매일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지는 법을 그로부터 배우고 있다.


결혼 전인가, 결혼 후 얼마 후인가 같이 부부상담을 갔다. 결혼 후 얼마 후인가 보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해도 이런 저런 갈등이 없을 수 없는 사이다. 40년을 자기 마음대로 살던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하나의 의사결정을 하며 산다는 건 아주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정말 이 사람은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일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퍼실리테이션을 하여 조정자 또는 촉직자로부터 대화를 이끌어듯이, 상담자와 3자 대화를 통해 '아 이 사람이 내 말을 흘려듣고 있지는 않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고, 서로의 매래에 대해서 진전이 없다면 그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상담자가 '당신의 배우자는 이런 배경의 생각을 하고 있군요. 이런 성향이 깔려 있군요'라고 말해주면 나와 상대방을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나는 부부상담을 적극 권하는 편이다. 사이가 나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지 말고 건강한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기를 적극 권한다.


그 때 상담을 갔을 때, 남편은 이미 상위 1% 남편이었다. 건강한 관계에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특히 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 지극하고, 그래서 나의 상담을 지지해주고 있으며(내가 같이 가고 싶다고 하니 단번에 응했다. 그리고 내가 나쁠 때마다 상담이 필요하다는 객관적인 상황을 말해준다.), 문제가 있어도 함께 하기 쉽지 않은 상담을 흔쾌히 와주는 것만으로도 상위 1%라고 했다. 게다가 상담사가 말하길 매번 문제가 있는 커플만 보다가 우리처럼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보니 좋다고 했다. 그래도 그것만 해도 몇 년 전이라 요즘에는 결혼 전에 건강검진 받듯이 상담을 하는 경우도 꽤 늘었다고 한다. 나는 찬성, 대찬성이다. 제 3자가 이끄는 대화에서조차 서로의 격차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같이 살기는 힘들다고 봐야하기 때문이고,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높은 상태여야지 상대방을 돌아볼 여유도 생기기 때문이다.


또 한번의 상담은 상담사가 직접 부부상담을 권했다.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난 후였다. 내가 상태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호보자의 관찰이 필요했다. 그래서 결혼 후 몇 년만에 나의 상태가 그냥 우울증이 아니라 죽고 싶어한다는 걸 남편에게 알려야했다. 그래서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었다. 세상 누군들 죽고 싶어하는 사람 옆에 있고 싶겠는가. 하지만 결혼했고, 결국 그 사람도 환자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 날 상담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온 몸에 힘이 다 빠졌었다. 남편은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매일 출근했는지 묻고 사랑한다고, 하루 잘 보내고 오라고 했다. 연애 이후 남편과 나는 매일 아침 그 카톡대화를 한다. 상담 이후 그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나의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채는데, 좀 더 귀신이 되었을 뿐. 그 때 상담사는 처음으로 약 처방을 권했고, 두 달 후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어서 병원에 갔다. 보통은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얘기했는데 나는 병증도 오래되었고 해서 좀 오래 걸릴거라고만 했다. 현재는 만 3년을 넘기고 4년차다.


중간에 이직 계획도 있었고, 상태가 좋아져서 약을 끊었다. 나는 의사도 동의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3개월 정도 끊었는데 정말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남편 말이 맞았다. 원래 약은 서서히 끊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사실 약 먹는 데 많이 지쳤었다. 중간에 정말 가기 싫은 날도 많았고 매번 챙겨먹는 것도 쉽지 않았다. 3개월 끝자락에 남편과 나는 대화를 나눴다. 그는 이 터널이 언제 또 나타날지 무섭다고 했다. 그리고 강력한 처방을 날렸다. '어느 배우자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배우자가 있는 집에 들어오고 싶겠어? 다음 터널이 올 때는 나도 자신이 없어.' 충격이었다. 짐작이야 했지만 진짜 집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라고 얘기하니 현타가 왔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럼 우리 이혼하는 거야?' 물었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상태를 기록해보라고 했다. 점수로. 나는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거라고.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가 아주 작은 뭐라도 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도 기록을 일기장에 하루, 이틀 적고 말았다. 어쨌든 상담과 투약을 재개했다. (남편은 내가 상담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서 나빠진다고 생각했다. 맞았다.)


부부 상담으로 시작해서 혼자 가는 상담으로 바꿨다. 알고 보니 남편은 내 상태를 엑셀로 만들어서 100점 환산표와 이벤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3-4월까지. 상태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고, 7월에 신랑이 그 표를 주면서 '너 기록 안 했지? 여기다 해봐'라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읽지도 쓰지도 못한지 몇 개월, 몇 년째라 기록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나보다 오래 나를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고마왔고, 상담은 그 기록지를 바탕으로 점검 상담이 진행되었다.


상담사는 '정말 상위 0.1% 남편이다'고 했다. 상담을 권유하는 것부터, 심지어 기록을 같이 제안하고 같이 해주고 있다는 건 정말 정말 정말 쉽지 않은 거라고 했다. 정신과 의사도 똑같이 말했다. 나는 상위 1%가 아니라 상위 0.1% 남편과 살고 있다. 이후로 나는 조금씩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브런치 글도 몇 년에 걸쳐서 썼던 걸 초반에 오픈한 거다.) 몇 일 전에는 짧지만 책을 읽고 한 페이지 글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상담은 내가 조울증 진단을 받으면서 한달에 한시간 점검 받는 기록에서 심화상담으로 2주마다 총 2시간 상담으로 바뀌었다. 상담갈 때는 신랑이 항상 데려다주고 데리고 온다. 상담 가고 오는 길이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망설이니까 올 해는 그렇게 해 주겠다고 했다.




우울증 환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잘 모른다. 엄마가 약간의 우울증이 있었다. 완경 이후로. 그래서 어렴풋이 알 뿐이다. 하지만 남편처럼 적극케어를 하며 산다는 건, 이 사람은 괜찮은지 매번 신경쓰게 되면서도, 괜찮은 척 지내는 게 힘들어서 따로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지금도 잘 살고 있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와 행동이 필요하다. 정말 정말 정말 큰 힘이 된다. 세상에 발 붙이고 살 수 있게 해주니까. 언젠가 나는 나의 남편이 바위이고 나는 그 바위에 빨간 실로 엮인 작은 새라고 생각했다. 땅에 내려올 줄 모르는 작은 새. 이제는 남편 위에서 쉬기도 하고 물도 먹고 밥도 먹는다. 잠도 잔다. 가끔 미친 듯이 날뛰지만 그래도 남편은 마치 연줄을 날리듯 나를 날리고 쉬게 하고 있다.


남편이 있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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