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소리에 대하여

_오감특집

by 윤호준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그 이유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원초적인 오감에 의한 희열 혹은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요인들 외에 추가적으로 엔돌핀이나 아드레날린 등을 생성하고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몇 편에 걸쳐 오감이 어떻게 나를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지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이 세상을 울리는 여러 가지 소리들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먼저, 가장 먼저 소주의 '첫 잔'을 따르는 소리이다. 다소 황당할 수도 있겠으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이 가는 이야기일 것이다. 소주의 첫 잔만이 낼 수 있는 이 청명한 소리를 다양한 의성어로 표현해보려 했으나, '꼴꼴꼴' 혹은 '똘똘똘'이 가장 적당한 것 같다. 주조회사의 치밀한 기획에 의해 이런 소리가 만들어졌는 모르겠으나, 소주의 첫 잔 따르는 소리가 주는 느낌은 매우 크다. 힘들고 지칠 때 따르면 어깨를 두드려주듯 '털~털~털~털' 다독여 주는 듯하고, 좋은 일이나 축하할 자리에서 따르면 당당하게 '떵~떵~떵~떵' 하면서 분위기를 끌어올려주는 듯하다. 이 소리가 왜 나는지 과학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공간과 공기가 만들어내는 작품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것이 계획적이었든 우연이었든 간에 첫 잔을 따를 때 응원하고 위로하듯이 마지막 잔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최근 OOO건설 광고를 보면서 큰 감동을 느꼈다. 아파트단지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고 있는 영상과 소리들을 가감 없이 담았다. 그리고 '놀멍'이라는 단어와 함께 '아이들은 조용히 클 수 없다'라는 카피를 던졌다. 순간 왈칵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의 인생에 가장 각인된 소리들 중의 하나인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펼치는 재잘재잘거리는 소리와 어딘가를 향해 외치는 소리들'이 여러 장면으로 오버랩되었다. 그 많은 장면들이 왜 이렇게 어제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를까? 그것은 아마도 그 놀멍을 관찰했던 상황들이 내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종합 비타민'처럼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포기해야 했던 '마음껏 외치기', '신나게 뛰어놀기', '목청껏 이름 부르기', '소리 내어 울기'등을 어린이들을 통해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우리가 '마음껏'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작아졌다.


어렸을 적에는 부뚜막에 앉아, 아궁이 속의 나뭇가지들이 타들어가는 소리들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초겨울 저녁 무렵에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지금은 밥 짓는 소리가 참 좋다. 프라이팬에 기름이 둘러지고 차르르르하면서 뭔가가 익어가는 소리 그리고 밥솥에서 스르르르 공깃소리가 슬금슬금 나더니 결국 밥이 완성되어 증기가 발사되는 츠르르르 하는 소리 그리고 도마 위에서 대파와 청양고추와 양파가 싹싹싸악 얇게 썰리는 소리 그리고 뽀글뽀글 거리며 된장국이 뜨거워지는 소리 그리고 식탁에 그릇들과 숟가락, 젓가락이 딸 각 딱 딱 놓이는 소리 그리고 밥솥이 열리는 소리, 된장뚝배기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그릇과 주걱이 그릇과 국자가 부딪히는 소리들이 너무 좋다.


추석이나 설에 고향집에 가면 이른 새벽부터 누군가가 쓰르르르 쓰르륵 쓰르르르륵 쓰륵 마당을 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가 싫다. 마치 그 소리는 살아온 날들에 겪었던 온갖 상처와 역경 그리고 우울한 기억까지도 쓰윽쓱쓱 쓸어내리는 듯해 그 치유의 쾌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지금은 깊은 산골의 오래된 가옥이나 작은 암자에서나 들을 수 있는 싸리 빗자루 쓸어내리는 소리가 참 그립다. 언젠가 싸리빗자루 2개를 대문간 옆 담장에 걸어놓고 흙마당을 쓸며 살아가리라.


오월의 신록이 모든 산하를 점령하는 시기에, 바람을 타고 숲으로 가자. 그 숲의 어디서든 앉거나 누우면 금세 바람과 나뭇잎들이 일으키는 소리들에 취할 수 있다. 수백만 아니 수천만의 나뭇잎들이 동시에 서로 얼굴을 비비고 또 손과 발을 부딪히는 그 합창곡은 생동감의 절정을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이다. 초대형 스펙터클은 바람이 멈추지 않으면 춰라라라락 춰라라라락 하며 오월 내내 계속될 기세다. 어떻게 해서든 고스란히 담아 오고 싶을 정도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혹은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헤맬 때 하루종일 아니 단 10분 만이라도 꺼내어 듣고 싶다. 이 세상엔 귀하고 값진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가 그것을 발견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할 뿐이다.


내 어릴 적 고향집 별채는 양철지붕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지붕의 양쪽 끝에는 '바람개비'가 달려 있었다. 그 소리에 얼마나 오랫동안 길들여 있었는지, 자극적인 쇳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지금은 양철지붕도 그 위의 바람개비도 찾을 수가 없지만 내 기억 속의 그 쇳소리는 바람의 흔적이었고 계절의 흔적이었고 날씨의 흔적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서글픔의 흔적이었다.


새하얗게 눈 쌓인 들판을 걸어본 적 있는가?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길을 한 발자국 걸으면 쓰확 쓰르확 쓰확 쓸르확 하는 태초의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들으며 정처 없이 눈길을 걸으면 하루종일 걸어도 지치지 않을 거 같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길을 내주고 나서야 눈길에서 뽀드득, 뽀득, 뽀득, 뿌드득하는 소리가 난다. 마치 잘 버텨내고 있다는 '칭찬 소리'로 들린다.


장작이 타는 소리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불꽃을 뿜어내며 끊임없이 뭔가를 말하지만, 바로 앞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가끔씩 숯의 조각들이 튀는 소리만 들린다. 그런데 이 소리들이 왜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걸까? 따그닥딱딱, 띡띡딱, 따각똑똑, 따각 하는 소리들이 나무로 살아온 지난날들을 축복하기 위해, 불빛으로 춤추며 위로하고 육신을 다 태워가며 노래하는 듯하다.


처마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그 자체로 오케스트라 합주곡이다. 악보는 없지만 그 박자와 구성이 너무나 완벽하고 그 선율이 너무나 아름다운 최고의 명곡이다. 이렇게 처마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날은 하루 종일 먹지 않아도 하루종일 사랑하지 않아도 행복할 것 같은 날이다. 이런 날이 온다면 따뜻한 온돌방에 누워 두꺼운 솜이불을 끌어안고서 밤을 지새우고 싶다.


저 멀리 어디엔가에서 개울물 소리가 들리면 이미 힐링이 되는 듯하다. 그러니, 개울이나 시냇물 가까이에 앉아 한나절동안 물멍을 때리고 있으면 그 효과는 치유의 힐링이라 해도 될 것이다. 쉼 없이 이어지는 또르륵쪽,또드륵,쪼르륵,쪼으륵 개울물 소리는 사람이 연주할 수 없는 선율이다.


마지막으로 빠질 수 없는 가장 좋은 소리들이 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 할머니의 목소리, 아빠의 목소리, 고모의 목소리, 삼촌의 목소리, 이모의 목소리, 형의 목소리, 누나의 목소리, 동생의 목소리, 친구의 목소리, 그리고 골목 어디선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다. '아들!(영호야!) 어서 와 밥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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