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김치

(PP)

by 윤호준

우리 집 현관 앞에는 늘 다양한 택배 상자가 쌓여 있다. 배달의 시대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많은 상자 가운데 유난히 나를 설레게 하는 물건이 있다. 바로 김치다. 나는 여전히 김치 없이는 밥을 먹은 것 같지 않다. 유럽식 레스토랑이나 일식집, 베트남·태국 음식점에 가서도 김치를 따로 요구하거나 주문한다. 심지어 고급 호텔 뷔페에 가서도 첫 접시는 반드시 김치로 시작한다. 나에게 김치는 그 어떤 진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음식이다.


다행히 우리 가족도 모두 김치 마니아다. 그래서 외식 메뉴를 정할 때 큰 이견이 없다.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음식을 가리지 않고 두루 잘 먹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큰 행운도 없을 것이다.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산다는 것,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우리 집에는 다양한 종류의 김치가 늘 준비돼 있다. 그래서 김치냉장고만 두 대다. 사계절 내내 가득 차 있고, 여름철에는 일부 공간에 과일이나 채소, 술과 생수를 보관할 뿐이다. 나머지는 김치가 차지한다. 묵은지, 김장김치, 물김치,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 고들빼기김치, 열무김치, 깍두기, 겉절이까지. 주메뉴에 맞춰 언제든 식탁을 풍성하게 채울 수 있다.




얼마 전 지방에 사는 지인이 묵은 김치를 보내줬다. 오랜만에 연락 준 지인보다 김치가 더 반가울 정도였다. 묵은지에 돼지고기 앞다리살, 대파, 표고버섯, 마늘을 넣고 끓이다 마지막에 들기름 반 스푼을 떨어뜨리면 명품 요리가 된다. 김장김치는 흔히 수육과 함께 먹지만, 나는 갓 담근 김치를 손으로 찢어 흰쌀밥 위에 올려 먹는 조합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수육은 어디까지나 김장의 수고를 달래는 술안주일 뿐이다.


물김치는 현대인의 입맛을 살리는 최고의 소화제이자 치료제다. 밥을 말아 마시듯 먹으면 두 시간쯤 뒤 다시 살아나는 식욕을 느낄 수 있다. 위장이 약한 사람이라면 식사 끝에 물 대신 반 공기쯤 마시길 권하고 싶다. 총각김치는 메마른 일상에 활력을 주는 흥분제다. 오도독 씹히는 감각과 감칠맛이 식탁 분위기까지 바꿔 놓는다. 갓김치는 향기의 음식이다. 특유의 향을 즐기기 위해 식사 중간중간 곁들이면 입안과 속이 가득 향기로워진다. 파김치는 갓 담근 풋내부터 잘 익은 깊은 맛까지, 늘 식탁에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열무김치는 바쁜 사람을 위한 초간편 건강식이다. 삶은 국수를 열무 물김치에 말아 먹거나, 고추장과 참기름, 달걀프라이를 얹어 비벼 먹으면 된다. 깍두기는 설렁탕, 곰탕과 찰떡궁합이다.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고들빼기김치는 겨우내 움츠린 몸을 깨워 주는 약제 같은 존재다. 해가 갈수록 음식이라기보다 약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김치에 진심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농촌 친화적인 정서와, 어머니의 정성과 집착 덕분일 것이다. 어릴 적부터 배추, 무, 파, 갓이 들녘에서 자라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고, 계절 따라 식탁에 오르는 그 신선한 마법을 매일 경험하며 살았다. 도시 유학 시절, 풍성한 식탁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가 빈자리를 채웠다. 나는 그 작은 행복이야말로 진짜 행복이라고 믿었다.


어머니는 내 도시의 식탁에서 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늘 챙겨주셨다. 내가 김치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시고, 평생 집착하듯 김치를 담가 보내셨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 요양원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 김치를 찾아 모으기 시작했다. 누군가 먹지 않는 김치를 버리려 한다면 우리 집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물론 아무 김치나 환영하지는 않는다. 김치는 정성과 사랑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국의 김치를 시범 주문해 먹어보고 가족 평가단이 동의하면 대량 주문하는 방식을 이어왔다. 이제는 김치 종류별로 지역 대표 업체가 정해져 있을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 현관 앞에서 익숙한 박스를 보았다. 30년 동안 보아 온 어머니 김치박스가 떠오를 만큼 비슷한 외관이었다. 순간 환영을 본 듯 착각했다. 주소지마저 고향이었으니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박스를 돌려보니 보낸 이는 고향 친구였다. 상자를 열자 집 안 가득 고향 숲의 향기, 추수한 들녘의 내음, 고춧대 태우는 냄새가 퍼졌다. 아니, 그것은 분명 친구의 손향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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