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나를 사랑하는 법

(PP)

by 윤호준

주말에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훑어보다가 예능 골프 프로그램에서 멈췄다. 개그맨 양 OO 씨 등 연예인과 이 OO 씨 등 운동권(?) 출신 연예인들이 제법 탄탄한 실력과 입담으로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었다. 최근 골프 문화가 나이와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탓에 구성이 다소 밋밋해도 시청률이 유지된다고 한다. 그만큼 골프가 대세가 된 시대라는 뜻이다.


그렇게 킥킥대며 보다가 반복되는 장면 하나에 깜짝 놀랐다. 개그맨 양 OO 씨의 독특한 행동 때문이었다. 본인이 친 샷이 만족스러우면 아주 즐거워하며 자기 팔목에 “잘했어, 잘했어”라고 말하고는 뽀뽀를 했다. 스스로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제스처였다. 그 광경을 몇 차례 지켜보며 ‘와우, 저 사람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칭찬하는구나. 인생이 참 풍요롭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저녁에는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 최종 순위를 가를 중요한 경기들이 전국 5개 구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은 타격 페이스가 가라앉아 있었고, 그 중요한 경기마저도 큰 점수 차로 지고 있었다. 협탁 위 맥주가 두 캔째가 되자 ‘저 감독은 요즘 감이 많이 떨어졌어. 이 순간에 위험하게 도루라니… 아, 쟤는 왜 아직 은퇴를 안 하나’ 같은 푸념이 쏟아졌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집에서의 독백으로.


감독의 오판으로 도루사로 원 아웃, 허무한 삼진으로 투 아웃. 그때 가끔 뜬금포를 치는 B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투수를 바라보는 자세와 눈빛이 뭔가 해낼것 같았다. 야구는 분위기와 흐름의 스포츠다. 역시나 상대 에이스의 초구를 받아쳐 담장 한가운데를 훌쩍 넘겼다. 몸속에서 도파민이 폭발하듯 흥분이 치밀었다. 박수를 치다 다이아몬드를 도는 B 선수를 보니, 그는 3루를 돌며 양손에 깍지를 끼고 이마, 코, 입에 대었다가 하늘로 들어 올리는 홈런 세리머니를 했다. 표정과 몸짓에서 극도의 기쁨이 드러났다. 아, 저렇게 해냈을 때 내가 나를 응원하고 내가 나를 격려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정년퇴직 후 2년간 공부해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한 선배가 있었다. 그분을 포함해 몇몇이 어렵게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30년 직장 생활 동안 그런 생생한 짜릿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합격은 정말 크게 감동했다”라며 과정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이야, 거울 앞에서 서서 한 번도 얘기해본 적이 없었거든. 근데 합격 통지를 받고 식구들과 외식하다 잠깐 화장실에 갔는데, 큰 거울이 딱 보이는 거야. 정면의 내 모습이 약간 늙긴 했지만 꽤 괜찮아 보이더라고. 그래서 거울 속의 나에게 말했어. ‘너 이번에 참 잘했다. 정말 수고했고 진짜 자랑스럽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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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한 친구 한 명은 프리랜서 성향이 맞는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을 약 여섯 번 옮겼다. 그는 독특한 습관이 있다. 매월 혹은 수시로 본인에게 ‘상’을 준다. 급여일마다 자신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하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둔다. 언젠가 가벼운 술자리에서 그의 태블릿 메모장에 정리된 ‘나를 위한 선물 리스트’를 본 적이 있다. 그 리스트를 훑다 보니 그의 인생 자체가 그 표처럼 빼곡히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정기 선물뿐 아니라 일상에서 자랑스러운 일을 할 때마다 부여하는 ‘특별상’도 있다고 했다. 그 간헐적 선물까지 포함하면 리스트는 정말 대하소설처럼 구성이 탄탄할 것이다. “그 특별 선물은 언제 주냐?”고 묻자, 그는 나지막이 답했다. “응, 내가 착한 일을 할 때.”


때때로 종로 인근에서 다국적기업 한국지사들과 B2B 업무를 맡던 시절, 한국 OO에 근무했던 최 OO 과장님이 생각난다. 약 3년간 교류하며 여덟 차례쯤 식사했다. 처음 점심을 하러 간 곳은 서대문의 ‘OO 해장국’이었다. 각자 전날 음주로 인해 “해장합시다”에 마음이 맞았다. 그런데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다소 당황스러운 장면이 펼쳐졌다. 주문하면서부터 최 과장님이 이것저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썬 대파와 마늘, 가능하면 부추도 조금. 소스를 직접 만들겠다며 소스 그릇 2개, 빈 그릇 하나, 작은 국자도 요청했다. ‘술이 덜 깼나?’ 싶어 속으로 슬슬 짜증이 올라올 즈음 그분의 행동을 보고 다시 놀랐다.


해장국 뚝배기 두 개가 나오자마자 작은 국자로 탕 위의 거품 덩어리를 걷어내며 말했다. “식품 연구가마다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이 거품은 우리 몸에 해롭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허허.” 걷어낸 거품을 능숙하게 빈 그릇에 담았다. 이어 간장과 마늘, 썬 대파, 부추, 고춧가루로 찍어먹을 소스를 즉석에서 만들고 ‘후춧가루’를 살짝 뿌렸다.

“차장님, 이제 맛있게 드시지요. 제가 좀 별납니다.”

“아닙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1순위지요.”

그가 다시 말했다. “에이, 아닙니다. 건강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이 한 끼가 정말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차장님과 첫 식사 자리잖아요. 최대한 맛있게 만들어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헤. 종교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처음엔 별난 사람이라 여겼지만 그 뒤 일곱 번을 다른 메뉴로 함께하며, 그는 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대충 때운다’는 생각으로 간편식을 집어 들다 그분이 떠오르면 마음을 바꿔 부엌으로 돌아간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성공하자, 다른 채널들도 비슷한 ‘다큐 예능’을 내놓고 있다. 각박한 삶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중년의 로망을 ‘자연인’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 연출된 로망에 이끌려 그 길을 택하는 사람은 10%도 안 될 것이다. 산이나 섬, 오지를 택한 이들에겐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대개 ‘건강 문제’, ‘사업 실패’, ‘인간관계 문제’다. 현실의 상처를 자연에서 치유하려 하거나, 배신과 실패 끝에 잠시 현실로부터 물러나는 선택이다. 그래서 그들을 ‘이기적’이라거나 ‘가족을 외면한다’고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건강이 위태롭거나 사업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자연을 택한 삶은 어쩌면 매우 현명하다.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린 사람의 자세는 특별해질 수밖에 없다. 더 참담해질 유혹들을 단칼에 뿌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살이나 알코올·마약 중독으로 치닫지 않고 현실에서 살짝 물러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훈련하는 시간. 그 과정을 통과해 적응에 성공하면 비로소 ‘진짜 자연’에 묻혀 행복하게 산다. 나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게 그에게도 가족에게도 최선일 수 있다.


나는 아들에게 늘 말한다. “먼저 너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사소한 순간에서도, 인생 전체를 바라볼 때도. 너를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아는 이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기적’이라는 돌을 던지지 말라. 그 돌을 들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진솔하게 사랑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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