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일상의 고마운 것들

(PP)

by 윤호준

평균 기대 수명이 80~90세에 이를 정도로 길어진 시대, 현대인들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성공의 대가로 얻은 큰 재물일까, 아니면 뜻밖에 찾아온 행운일까. 그렇다면 그런 재물이나 행운이 평생 몇 번이나 우리를 안정적으로 케어해 줄 수 있을까.


어떤 특별한 전문가들만 내공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복잡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행복하고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일상의 작은 것들’에 감사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작은 성취를 마음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이 결국 심적 안정의 울타리가 되고, 긴 행복을 위한 영양소가 되며, 여유로운 일상을 위한 마음의 근육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감사하며 살고자 한다. 일상에서 누리는 작은 기쁨들, 인생의 어느 순간 문득 다가왔던 혜택이나 행운에 대해서도 늘 고마운 마음을 품는다. 특히 한겨울, 매서운 한파 속 이불 안에서 되새겨본 ‘나의 고마운 하루’는 더욱 특별하다.




아침은 알람보다 먼저 깨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최근 들어서는 5시 20분쯤이면 눈이 떠진다. 따뜻한 전기장판과 차가운 공기의 대비를 느끼며 10분쯤 누워 있다가, 알람이 울리기 전에 ‘알람 전 끄기’를 누른다. 그 작은 행동 하나가 하루의 첫 기쁨이다. 기계가 아니라 나의 리듬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만족감. 그리고 전기장판의 자동 꺼짐 기능을 확인할 때 또 한 번의 안도감을 얻는다.


나는 매일 아침 혈압약을 챙겨 먹는다. 집안 내력이 있어 40대 중반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하루를 지켜주는 든든한 보호막을 얻은 셈이다. 작은 알약 하나가 내 삶을 지탱해 준다는 사실이 고맙다.

또한 두 번의 치질 수술을 겪으면서 알게 된 고마움도 있다. 의사들의 전문성에 감사함을 느꼈지만, 무엇보다 일상에서 큰 위안을 주는 발명품이 있다. 바로 비데다. 수많은 발명 중에서도 생활 속에서 가장 큰 차이를 만든 이 발명에, 나는 늘 감사한다.


출근길에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원격 시동 기능은 또 다른 축복이다. 혹한의 겨울에도 차에 오르면 이미 따뜻한 바람이 나오고, 핸들과 시트가 데워져 있다. 냉기를 뚫고 운전석에 앉는 순간 느껴지는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회사로 향하는 길, 정문을 돌며 바라보는 작은 산등성이 위의 일출은 매일 새롭다. 분홍빛과 붉은빛이 번지는 순간마다 “오늘도 멋지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도심 속에서도 이렇게 장엄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보통 6시 30분. 첫 출근자 중 한 명이 되어 하루를 준비한다. 이후 지하 스포츠센터에서 땀을 흘리고 온·냉 샤워를 즐기면, 내 몸에 남아 있던 스트레스까지 씻겨 내려간다. 운동과 샤워가 마음까지 정화시켜 준다.


구내식당에 들어서면 풍경은 늘 비슷하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거의 모든 이가 혼자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한다. 점심이나 저녁과는 다른 고요한 분위기다. 식단은 세 가지, 한식과 웰빙식, 그리고 라면이나 김밥 같은 분식이 준비돼 있다. 다양한 요구를 배려한 훌륭한 환경이다. 1,500원이면 김밥 한 줄을 먹을 수 있는데, 퀄리티도 좋아서 즐겨 찾는다. 체중을 조절할 땐 잠시 중단했다가도 다시 찾곤 한다.


하루 8시간의 연속된 노동은 때때로 버겁다. 입사 초반만 해도 밤 10시를 넘겨 퇴근하는 날이 잦았는데, 이제는 9 to 6 근무가 정착되었다. 근무 시간에 집중하고, 저녁에는 여유를 보장받는 이 문화가 얼마나 좋은가. 물론 업무와 사람들 사이에서 스트레스가 쌓이기도 한다. 그럴 땐 사무실 뒷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펼쳐지는 뒷동산이 위로가 된다. 그곳에 서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짧은 명상으로 마음을 정리한다.


중년에 들어서면서 이유 없이 기운이 바닥날 때가 있다. 그럴 땐 일하는 것 자체가 모두에게 손해다. 잠시 머리를 멈추고 다시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가끔 골프가 그렇다. 파란 하늘로 하얗게 뻗어 나가는 공을 바라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각자 방법은 다르지만, 중요한 건 휴가를 반차나 시간차로 나눠 쓰며 재충전할 수 있다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이다.


오후 5시 50분쯤이면 사무실 여기저기서 서랍 정리하는 소리가 들린다. 6시 정각, 1차로 칼퇴하는 직원들이 쏟아져 나가고, 곧이어 2차 순번들이 퇴근하면 6시 30분 무렵엔 사무실이 텅 빈다. 그리고 저녁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하루 3시간 이상을 자기 삶을 풍요롭게 쓰는 이 문화는 축복이다. 이런 풍토가 정착되도록 애쓴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다.


대형마트에 가지 않은 지도 오래다. 이제는 일주일 두 번 새벽배송이면 충분하다. 소파에 앉아 싱싱한 채소와 과일, 생선, 고기를 고르고, 아침이면 현관 앞에서 받아든다. 생활 속 소소한 필요가 얼마나 큰 혁신을 만들어냈는지 실감한다. 한 업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앱으로 주문하면 된다. 머지않아 창문을 열면 드론이 점심을 배달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가족은 세 명뿐인데, 재활용 쓰레기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내다 버려야 한다. 도시 가정이라면 다들 비슷할 것이다. 배달 용기와 공산품, 생활필수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일 재활용을 배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만약 한 달에 한 번만 가능하다면, 끔찍할 것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산책을 즐긴다. 구도심 골목길도 좋고, 빌딩을 따라 도는 것도 좋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무조건 우산 없이 걸어 나가곤 했다. 지금은 가까운 탄천길이 가장 좋다. 집에서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길을 걸으며, 어떤 날은 노래를 하고, 어떤 날은 춤을 추고, 또 어떤 날은 손을 흔들며 지휘를 흉내 낸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샤워를 하고 나오면, 언제나 뽀송한 수건이 기다린다. 서랍장에 준비된 갈아입을 옷, 냉장고 속 시원한 생수, 거울에 비친 아직 꿈꿀 수 있는 내 모습. 그 모든 순간이 감사하다. 결국 잠자리에 누워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떠올리며, 가족의 무탈함과 내 고른 숨소리에 감사하다가 어느새 깊은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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