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내 일상의 고마운 것들

나에게 선물하는 산문집

by 윤호준

평균 기대 수명이 80~90세에 이를 정도로 긴 호흡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스스로를 잘 관리하고 또 지탱하게 하는 원천적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성공의 대가로 축적되는 큰 재물일까? 뜻밖에 획득하게 된 행운들일까? 그렇다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런 재물이나 행운들이 몇 번 정도씩 우리를 찾아와서 안정적으로 케어해 줄 수 있을까?




어떤 특별한 업무를 하는 전문가들만이 내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또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일상의 작은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습관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작은 것들'에서 느끼는 성취감들을 마음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놓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축적된 것들이 결국 심적 안정을 위한 울타리가 되고 긴 행복을 위한 영양소가 되고 또 여유로운 일상을 위한 마음 근육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것에서부터 중대한 일까지 최대한 감사하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일상에서 누리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 고마워하고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문득문득 작용했던 작은 혜택이나 행운들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유난히 매서운 한파가 불어닥친 어느 겨울날, 이불속에서 마치 슬로우 영상처럼 되돌아본 나의 고마운 하루를 소개해 보려 한다.




나의 기상 알람은 최근 15년 동안 매일같이 5시 50분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5시 20~30분경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그러면 왠지 기분이 좋다. 그리고 약 10분 정도는 전기장판의 따뜻한 기운과 이불 밖의 선선한 공기의 조화로움을 만끽한다. 그리고 알람이 울리기 전에 '알람 전 끄기'를 클릭한다. 그렇게 알람전 끄기를 하고 나면 그냥 기분이 좋다.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작은 기쁨들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전기장판의 '전원 끄기'버튼을 누른다. 여기에도 일상의 기쁨 하나가 있다. 그것은 전기장판의 '12시간 후 자동 꺼짐 기능'이다. 이 기능이 곧 출근해야 하는 나를 안심시키고 또 행복하게 한다.



우리 집안은 가족 대부분이 혈압이 높다. 나도 어쩔 수 없이 40대 중반에 혈압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혈압약이 나의 피를 진정시켜 준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혈압약이 오히려 나를 자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성격이 급해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컨트롤하기가 버겁다. 그러나, 나는 일어나자마자 씻기 전에 '혈압약'을 챙겨 먹는다. 얼마나 좋은가? 나의 혈압을 조절해 주는 약이 있다는 것이. 혈압약이 나의 하루를 지켜주기 시작한 것이다.




직장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특히 사무직에게 잘 찾아오는 고질병들은 정도와 시간의 차이일 뿐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에게 찾아온다. 그중의 하나가 '치질'이다. 나는 치질 수술을 두 번 했다. 큰 수술을 아니었지만, 그래도 긴장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런 특별한 수술을 즉흥적으로 잘 수행해 내는 의사들도 참 고맙지만, 그보다 더 고마운 것이 있다. 바로 '비데'라는 제품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훌륭한 발명가들이 우리의 문명에 큰 모멘텀을 기록했지만, 나는 비데를 개발한 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출근을 위해 주차장으로 가면, 나의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오래된 친구를 기다리듯 대기하고 있다. 연중 가장 추운 이 시기에는 실내 주차장임에도 불구하고 싸늘한 느낌이 온몸에 전해진다. 그래도 샐러리맨은 매일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집에서 문을 나서기 직전에 원격으로 시동을 걸면, 차에 도착하는 사이에 이미 설정해놓은 공조 수치대로 히터가 작동해 있고 또 시트와 핸들의 열선이 켜져 있다. 오! 차가운 바깥 공기를 헤치고 차량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는 순간 그저 행복감이 느껴진다.




주차장을 나와 정문을 통과하려고 우회전을 하는 순간, 남쪽 하늘에 맞닿아 걸쳐진 작은 산등성이를 바라본다. 거의 매일 '와우! 어제와는 또 다른 정말 멋진 풍경이군!" 하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낮은 산등성이 위쪽으로 펼쳐지는 다채로운 풍경의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각박한 도회지에 살면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홍 일출과 붉은 일몰의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회사의 사무실에 도착하면 보통 6시 30분. 내가 첫 번째이거나 두 번째 정도다. 입사 이후 늘 8시 전에 출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책상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켜서 오늘의 일정들을 체크하고 나면 지하 스포츠센터로 간다. 아침부터 여기저기 이동하지 않고 회사에서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감사하다. 그리고 땀흘린 운동 후의 가장 큰 기쁨인 온.냉 샤워를 즐긴다. 그러면서 내 몸 어딘가에 먼지처럼 남아있는 '상사나 동료들의 특이한 성격'까지도 깨끗하게 씻어 내린다. 가끔씩 마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행동이나 감각이 대신 해결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구내식당으로 간다. 그 시간의 구내식당의 풍경은 늘 비슷하다. 거의 99%는 혼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점심식사나 저녁식사와는 다소 개념이 다른 아침 시간이다. 회사 구내식당에서는 3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한식, 웰빙식 그리고 라면, 김밥 등 분식이다. 다양한 요구를 배려하는 훌륭한 식단 환경이다. 1,500원이면 퀄리티가 좋은 김밥 한 줄을 먹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아침식사로 즐겨 먹다가, 체중 조절이 필요하면 중단했다가 또다시 즐겨찾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루 8시간의 연속된 노동은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에게는 다소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어느새 지금은 9TO6의 풍토가 정착화되는 것 같다. 근무시간에 최선을 다해 일하고 개개인이 저녁시간의 여유를 보장받는 문화가 얼마나 좋은가? 한편으로는 그 8시간 중에도 일 때문에 혹은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나를 다독여줄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사무실 뒤쪽 현관으로 나가면 바로 앞에 뒷동산이 펼쳐져 있다는 것이 참 좋다. 그곳에 서서 스스로에게 수많은 위로를 하고 또 다양한 목적의 명상을 하고 있다.




중년에 접어들자, 특별한 이유 없이 컨디션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순간들이 갑자기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일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고용인과 피고용인 모두에게 손해다. 그래서 잠시 머리와 가슴을 정지하고 다시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러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이나 나만의 절대 휴식을 활용해야 한다. 예들들어 나는 아주 가끔씩 푸른 창공으로 빨랫줄처럼 뻗어나가는 하얀 골프공을 바라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거리와 방향은 다소 다를지라도 클럽의 로프트와 비슷한 각도로 뻗어나가는 하얀 공을 바라보면 뭔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다. 그 방법은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그 활용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연차를 반차 혹은 시간차로 나눠 쓸 수 있는 휴가제도가 있어서 좋다.




요즘은 오후 5시 50분 되면,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책상 서랍 정리하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6시 정각이 되면 1차로 단골 칼퇴근 직원들이 우수수 빠져나가고 그다음 2차 순번들이 퇴근하면 6시 30분경에는 사무실이 거의 텅텅 빈다. 저녁 6시 30분부터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노동자들에게는 더없는 축복이다. 매일 3시간 이상을 오롯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들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개개인이 2개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이 아름다운 풍토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던 많은 이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오프라인 대형마트에 가본 지가 오래된 것 같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새벽 배송으로 주문하면 되기 때문이다. 편하게 소파에 앉거나 누워서 대형마트 곳곳에 진열된 싱싱한 채소와 신선한 과일과 생생한 어패류 등 모든 제품들을 쇼핑할 수 있다. 요즘 세상은 인간의 소소한 니즈로부터 많은 혁명적인 일들이 이루어진다. 나는 새벽 배송이 좋고, 잘 활용하고 있다. 제품의 종류도 공급자의 다양성도 충분하다. 어느 한 유통업체의 제품이 문제가 있다 싶으면 다른 회사의 앱을 활용해 주문하면 된다. 내 방의 창문을 열면 똑똑한 배송 드론이 내 점심 식사를 공손하게 전달해주는 시대가 머지 않았다.




우리 가족 구성원은 고작 3명인데, 재활용 쓰레기 배출량은 주 2회 이상 처리해야 할 정도로 많다. 대부분의 도시 가정에서는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배달음식의 각종 용기들과 수많은 공산품 그리고 온갖 생활필수품들이 재활용 쓰레기로 겹겹이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할 수 있는 이 환경이 고맙다. 이 쓰레기들을 집안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월 1회 정도만 배출이 가능하다고 상상해 보라. 끔찍하다.




나는 저녁을 먹고나면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구도심의 골목길을 걷는 것도 좋고, 낮은 산의 오솔길을 따라 걷는 것도 좋아한다. 심지어 회사의 빌딩 주위를 빙 둘러 걷는 것도 좋고, 아파트 사잇길을 걷는 것도 좋다. 심지어 40대 후반까지는 비만 오면 무조건 나갔다. 우산도 없이 하염없이 걷다가 들어오면 늘 물에 푹 빠진 생쥐 꼴이었다.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것이 탄천길을 걷는 것이다. 현관을 나가면 5분도 채 되지 않아, 탄천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지금도 그 탄천길을 걸으며 어떤 날은 춤을 추고 또 어떤 날은 노래를 하고 또 어떤 날은 연주하고 지휘를 한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샤워를 마치면 늘 뽀송뽀송한 수건이 옆에 놓여있다는 것이 좋다. 갈아입을 새 옷이 서랍장에 있어서 좋고,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생수가 준비되어 있어서 좋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아직도 꿈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생각한다. 현재에 대해 감사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가족의 무탈함과 나의 고른 숨소리에 감사하며 어느 순간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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