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응급구조용 백팩

(PP)

by 윤호준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준비하며 적당한 가방을 찾다가, 수납장 구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가방을 발견했다. 다른 가방들은 텅 비어 홀쭉해져 있었지만, 그 가방만은 묵직하게 부풀어 있었다.


꺼내는 순간 손끝에서 전해지는 무게와 익숙한 감촉에 저절로 한숨 섞인 웃음이 나왔다. 지난 겨울 집회에 자주 들고 다니던 백팩이었다. 가방을 열어 바닥에 쏟아보니, 아스팔트용 깔판, 우의, 넥워머, 보온용 모자, 손난로, 촛불 모양의 형광등과 응원봉까지 나왔다. 심지어 초콜릿과 하루견과 그리고 홍삼 스틱 같은 간식도 들어있었다.


물건 하나하나를 집어 들며 살펴보니, 지난 십여 년간 집회 현장에서 마주했던 긴장과 절박함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성인이 되어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도, 지켜만 볼 수 없었던 분노와 저항의 순간들이 있었다. 광우병 사태, 세월호 참사, 국정 농단, 조국 사태, 이태원 참사, 그리고 12.3 내란 사태까지.


그럴 때마다 아내와 나는 말없이 그 백팩을 꺼냈다. 우리는 정치적 동지이기보다 정의를 바라는 동지였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모두가 잘 살아가길 바라는 소박한 희망에서 출발했기에 의견이 엇갈릴 일이 없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빚을 지고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30년 직장 생활 동안 마이너스 통장조차 쓰지 않았다. 넉넉하게 살진 못해도 빚은 지지 않는다. 세상을 향해 백팩을 챙기듯, 빚지고 사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다.


그래서 내 나라의 민주주의도 지키고 싶었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내 의지가 허락하는 한, 세상에 무임승차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집회용 백팩을 늘 준비해 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특정 이념이 아니라, 상식과 정의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본 결과였다.


이번 주말에는 그 '사회 응급구조용 백팩' 속 물건들을 꺼내 튼튼한 종이박스에 담아 창고에 넣을 생각이다. 그 박스는 언제일지 모를 미래까지 그대로 보관해 두겠지만, 바라건대 꺼낼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번 정부에서도, 다음 정부에서도 더는 찾지 않아도 되는, 낡은 카세트테이프 같은 불필요한 물건이 되었으면 한다.


P.S.

아마 우리 집처럼 집회용 백팩을 준비해 둔 가정이 많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믿기 힘든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집회 현장에서 문득 둘러보면, 각자 철저히 준비해 온 물건들을 꺼내 놓은 시민들이 많았다. 우리 부부도 형편이 허락하는 선에서 함께했지만, 그분들께 늘 고마운 마음이 있다. 이제 그분들 역시 응급구조 백팩을 비워 창고에 넣어두길 바란다. 더는 거리에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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