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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갈에누운백구 Jul 17. 2023

곰에게 잡아먹힌 한 사람의 일생

<그리즐리맨> 리뷰


곰을 너무 사랑해 알래스카에서 13년간 회색곰(그리즐리)를 따라다닌 티모시 트레드웰은 2003년 10월, 카트마이 국립공원 141번 곰에게 잡아먹혔다. 그가 만난 마지막 곰은 8월이면 동면에 드는 알래스카에서 홀로 잠들지 못해 벌판을 떠돌던 28살의 늙은 곰이었다. 트레드웰의 신원은 사살된 곰의 몸에서 나온 옷가지와 손목시계로 확인됐다.

늙은 곰의 몸에서 트레드웰의 시신을 수습하는 도중엔 대여섯 살 된 곰이 갑자기 순찰대원에게 달려들었다. 그 어린 곰은 곧바로 사살됐다. 어린 곰이 무슨 이유로 순찰대원에게 달려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린 곰은 늙은 곰과 아는 사이였을 수도 있고, 트레드웰과 아는 사이였을 수도 있다. 트레드웰은 13년간 알래스카 카트마이 국립공원을 돌아다니며 그가 만난 회색곰들에게 이름을 붙여줬고, 그중엔 늙은 곰과 어린 곰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누가 누구와 아는 사이고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늙은 곰과 어린 곰과 트레드웰은 모두 죽었다. 그들 중 누구도 온전한 시신을 남기지 못했다. 어린 곰의 사체는 늙은 곰을 부검하는 사이 다른 동물에게 먹혔다.      


영화 <그리즐리맨>은 회색곰에게 자신의 운명을 바친 트레드웰의 삶을 천천히 뒤쫓는다. 트레드웰이 찍은 100시간 분량의 푸티지와 주변 사람의 인터뷰, 감독 베르너 헤어조크의 나레이션이 이리저리 덧붙여져 완성된 한 편의 영화는 트레드웰의 인생을 꿰매어낸다. 온전히 수습되지 못한 그의 시신처럼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하나로 수습되지 않는다. 그의 진짜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그리즐리맨’으로 만든 것일까.     



흩어진 시신과 흩어진 이름들     


그는 자신을 환경운동가라 불렀다. 하지만 어떤 환경운동가에게 그는 곰의 영역을 존중하지 않은 ‘침입자’였다. 그를 알래스카에 데려다준 비행사는 그를 ‘정서적으로 뒤떨어진 사람’이라 불렀고, 그의 곰 수업을 들은 초등학교 아이들은 그가 1년 중 가장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그는 돈을 밝히는 운동꾼이었고, 알래스카를 관리하는 생태학자에겐 공원의 규칙을 위반하는 범법자였으며 그리즐리 보호 운동을 함께한 동료에겐 따뜻한 생태주의자였다.     


산발적으로 흩어진 수식어들 사이 그가 원했던 그의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그리고 싶었던 자신의 이미지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를 피해 숲 속에 캠프를 설치한 이유를 말하는 단순한 영상을 15번씩이나 다시 찍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 더 완벽한 걸로, 다시 가보자”


하지만 다시 찍은 영상을 보더라도 그가 찾는 완벽의 지향점을 찾긴 어렵다. 다음 컷에도 그는 거의 똑같이 설명하고 거의 똑같이 흥분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구름의 위치와 햇빛의 방향이 미세하게 바뀌었다는 것. 구름과 햇빛이 그의 위에 영원히 멈춰 그에게 시간을 허락했다면 그는 영상을 찍고 또 찍었을 것이다.


"한번 더 완벽한 걸로"


자연다큐 같지 않은 자연다큐     


트레드웰의 카메라는 분명 다른 환경운동가들의 카메라와는 달랐다. 그는 마치 연기자처럼 카메라 앞에 섰다. 대다수의 푸티지에서 그는 셀카를 찍듯 곰과 자신을 함께 담았지만 같이 간 여자친구의 모습은 철저히 숨겼다. 그는 오직 자신과 그리즐리만이 존재하는 순수한 자연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그 점에서 그의 자연다큐는 보통의 자연다큐가 경계하는 지점들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자연다큐의 미덕은 관찰자의 주관을 자제하고 자연이 노래하는 생명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담기 위해서 이해의 범위 밖에서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을 포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레드웰은 주관적인 경험과 사사로운 시선을 자신의 자연다큐에 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의 개입은 주변 환경을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곰의 먹이인 연어들이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면 수로를 만들어 통로를 틔워주고, 굶주린 어미곰이 새끼곰을 잡아먹고 남긴 머리뼈를 보곤 먹이를 내려주지 않는 주요 종교의 신들에게 적나라한 욕설을 날린다. 그 와중에도 욕설에 그의 화가 충분히 담기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그는 이렇게 말하며 그 씬을 다시 찍는다. 


“다시 가자, 너는 지금 정말 화가 난 상태야”      


미끄러진 트레드웰


그의 자연다큐는 항상 이런 식이다. 혹여 숲길을 걷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는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그가 바라보는 자연은 그렇게 누군가를 곤경에 빠뜨리는 미끄러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저히 자연다큐엔 어울리지 않는 그의 고집스런 연출법. 하지만 그가 감정을 격하게 쏟아낼수록, 그의 주관적인 시선을 카메라에 욱여넣을수록 그의 다큐멘터리엔 자연다큐에서 느낄 수 있는 기이한 경이로움이 새어 나온다. 만약 그도 자연의 일부라면, 그가 알래스카의 그리즐리 곰을 관찰하듯 우리가 알래스카에 살며 곰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기이한 존재 티모시 트레드웰을 관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자연다큐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위치가 전복된 자리에서 관객의 눈은 그리즐리를 바라보듯 트레드웰을 바라보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트레드웰이 다큐멘터리스트의 사랑의 눈빛으로 그리즐리를 바라볼 때 관객은 순찰대원의 차가운 눈으로 트레드웰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13년간 그리즐리를 쫓아다닌 불가사의한 존재 트레드웰을 이해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따라가보고 그가 남긴 푸티지를 따라가며 어느 순간 우리는 이런 말을 하게 되길 기대하진 않나.


'그가 왜 그랬는지 이제 알겠네'     


트레드웰의 부모님


그는 왜 곰을 쫓아다녔을까?     


이런 관객의 기대를 잘 알고 있는 헤어조크 감독은 트레드웰이 그리즐리에 광적으로 빠졌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카메라 앞에 앉은 트레드웰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부터 좋아한 곰인형을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인터뷰에 응한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부터 동물에 관심이 많았고 곰 인형을 특히 좋아했다. 그리고 삽입되는 트레드웰과 그의 어릴 적 애완동물 다람쥐 윌리의 사진은 그의 그리즐리 사랑의 기원을 짐작케한다.


‘트레드웰은 어릴때부터 동물과 지독히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구나’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의 대학 입학 이력이다. 다이빙 선수였던 그는 다이빙 실력을 인정받아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것이 트레드웰이 그리즐리와 사랑에 빠진 이유와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관련성은 찾으면 찾아지는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인터뷰이 중에서도 트레드웰의 부모님을 애타게 찾은 이유도 그의 유년시절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부모님에게서 기행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 아니었나.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유년시절의 이야기는 문제의 원인을 끌어올리는 데 실패하는 법이 없다. 그는 다이빙 장학금이 끊겨 집으로 귀환했고 이후 마약과 술에 빠져 어두운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생각에 평범했던 아들이 이상하게 변해버린 이유는 대학 생활의 실패 때문이었다.     


트레드웰이 찍은 푸티지 中


옆에 앉은 아버지의 생각은 다르다. 아버지는 트레드웰이 바라던 배우의 꿈이 좌절되자 그가 마약과 술에 빠졌다고 말한다. 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끈 드라마 <치어스>에서 바텐더 역의 오디션을 본 트레드웰은 배역을 얻는 데 실패했다. 그 배역은 우디 해럴슨에게 돌아갔다. 아들이 우디 해럴슨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덧붙이는 아버지는 그 실패가 그를 “파괴”했다고 단호히 대답한다. 우디 해럴슨이 트레드웰 대신 <치어스>에서 맡은 배역은 모두에게 호감을 주지만 남에게 잘 속는 시골 출신의 순진한 청년이었다. 우디 해럴슨은 그 배역으로 거대한 성공을 이뤘다. 만약 트레드웰이 그 배역을 따냈다면 ‘그리즐리맨’은 탄생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트레드웰은 배역을 따내지 못했고 롱아일랜드 시골 출신의 순진한 청년은 알래스카로 떠났다.      


트레드웰의 일기에서 그는 자신이 그리즐리에 빠지게 된 순간을 명확히 설명한다. 친구와 함께 간 알래스카에서 그리즐리를 처음 본 후 그는 곧바로 그 거대한 존재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사랑에 빠진 동물이 알래스카에 사는 수많은 동물 중 가장 포악하고 거대한 그리즐리 곰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선택한 동물은 그가 찍은 영상 속에서 유일하게 그를 따르는 붉은 여우도 아니었고 어릴 때부터 키우던 다람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무한한 사랑에 오직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그리즐리를 선택했다. “저는 그들을 너무 사랑하는데 그들은 너무 쌀쌀맞아요”라고 눈물을 지으면서도 그의 선택은 변하지 않는다. 그가 슬퍼할 때 유일하게 옆을 지키며 그를 위로하는 붉은 여우를 운명의 상대로 삼을 순 없었을까.      



응답 없는 무정한 자연, 무정한 삶     


푸티지와 인터뷰를 따라가며 티모시 트레드웰의 삶을 꿰매던 헤어조크는 급기야 전면에 등장해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트레드웰의 삶에 대한 모두의 생각이 다른데 그의 생각을 덧붙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는가. 트레드웰이 격한 감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리즐리와의 사랑에 대해 토로할 때 헤어조크는 이렇게 덧붙인다.


 “저는 트레드웰과 생각이 다릅니다” 


또 다시 등장한 사사로운 다큐멘터리스트. 감독 헤어조크가 트레드웰 못지 않은 기행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그는 트레드웰이 찍은 곰의 표정에서 어떤 친밀감이나 이해심을 느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헤어조크는 곰의 갈색 눈동자에서 오직 자연의 냉담함만을 본다.      


곰의 눈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여기서 우린 트레드웰이 대학 생활에 실패하고 연기 생활에 실패한 뒤 만난 그리즐리와의 첫 번째 대면을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알래스카에서 처음 그리즐리를 맞닥뜨린 트레드웰은 정말 그 곰의 눈에서 친밀감과 이해심을 느꼈을까. 그는 우호적인 곰을 만날 때나 적대적인 곰을 만날 때나 곰과 헤어질 땐 결코 “사랑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곰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메아리 없는 사랑의 외침은 계속된다. 그의 광적인 구애의 목소리, “사랑해”기어이 그리즐리를 사랑하고 말겠다는 어떤 절박함과 의지가 느껴진다.     


어쩌면 그는 그리즐리가 영원히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직 무관심으로 응대하는 상대에게서 느끼는 무력감을 트레드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삶 앞에 무기력을 느끼던 청년은 어떠한 자비도 없이 거대하게 버티고 선 그리즐리의 무정한 눈에서 자기 자신을 비춰본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가 일생을 바치기로 선택한 동물은 받은 만큼 사랑을 돌려주는 여우나 다람쥐가 아니었다. 그리즐리가 그의 옆에 와서 부드러운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면 그는 그리즐리를 그토록 사랑했을까.

세계의 끝에서 이뤄진 그리즐리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만난 것은 무정한 삶 앞에 선 자기 자신이었다. 텅 빈 눈을 가진 응답 없는 존재 그리즐리를 사랑으로 길들여보려던 그의 손짓은 응답하지 않는 삶에 건네는 손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지치지 않는 손짓은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카메라 앞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똑같은 씬을 찍고 또 찍었듯이 언젠가 삶은 그의 끝없는 손짓을 끝내야 할 때를 정확히 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경우 그것을 알려준 것은 28살의 늙은 곰이었다.      


무정한 삶을 향한 끝없는 구애     


카메라를 두고 그가 사라진 자리. 그는 미끄러진 숲길을 다시 걷기 위해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그가 없는 풍경엔 풀들이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감독이 트레드웰이 남긴 100시간의 푸티지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한 그 장면. 그는 연기를 하기 위해 무대에서 사라졌다. 흘러가는 구름과 흔들리는 풀들 사이로 그는 다시 나타나 액션을 외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다시 풀숲을 뛰어 내려올 때까지 흔들리는 풀들은 무심히 그를 기다려줄 것이다. 혹시 그가 영영 내려오지 않더라도. 그 무심한 자연 앞에서 뛰고 또 뛰는 트레드웰의 모습은 어떤 자연다큐에서도 볼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이 들려줄 수 있는 생명의 노래로서 슬프도록 아름답다.      


헤어조크 감독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한 장면


트레드웰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던 주변 사람의 말들도 모두 지나가고 그가 남긴 푸티지도 모두 끝났다. 그 많은 말들이 지나간 자리에 붙은 수식어들은 하나씩 떨어져 나가다가 그 끝에 하나의 문장만을 남길 것이다.


‘티모시 트레드웰, 곰에게 잡아먹힌 사람’.


이 무심한 한마디엔 얼마만큼의 트레드웰이 담겨 있을까. 그를 수식하는 모든 표현들을 가져오더라도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물음에 응답해줄 티모시 트레드웰은 없다. 트레드웰이 끝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리즐리 곰에게 하나씩 이름을 붙여주고 무한한 사랑을 주었듯이 헤어조크 감독은 <그리즐리맨>을 통해 트레드웰의 일생에 수많은 설명과 이름들을 붙여주며 사랑과 애도를 표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 또한 무정한 삶을 향해 끝없는 구애의 손짓을 보낸 트레드웰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그의 알 수 없는 삶에 여러 이유들을 덧붙여본 것에 용서를 구하고 싶다.     


영화의 말미, 트레드웰은 두 마리의 곰과 함께 카메라 밖으로 멀어져간다. 그 두 곰은 트레드웰을 삼킨 늙은 곰일 수도 있고 순찰대원에게 달려들다 죽음을 맞이한 작은 곰일 수도 있다. 그 두 곰의 정체가 무엇인지, 트레드웰의 일생이 어떻게 흘러가다 그 두 마리의 곰에게 당도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제 그는 두 곰과 함께 카메라의 비좁은 프레임 밖으로 나가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자연의 무한한 환대를 누릴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NtliiyT3M&ab_channel=JohnWayne

<그리즐리맨>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MBxuk0r6QQ&ab_channel=DonEdwards-Topic

영화의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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