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기억을 담는다.

지나온 공간 다시 훑기

by 담하

나는 가끔 과거를 쫓아, 이미 지나온 공간을 다시 훑는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 다니던 유치원, 학창 시절의 모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던 장소들. 처음 서울에 올라와 살았던 고시원과 조교로 일했던 기숙사, 그리고 처음으로 얻었던 원룸까지. 그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여전한 것도 있고, 이미 사라진 것도 있다. 하지만 그 공간이 지금도 그대로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을 돌아보는 일, 나는 그것이 좋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장소는 아련하면서도 새롭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인 경우보다, 기억과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없이 크게만 느껴졌던 건물도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생각보다 낮고 작다. 건물이 작아진 건 아닐 것이다. 그동안 내가 자랐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기억과 어긋난 풍경 앞에 서면 묘하게 신기해진다. 나는 이런 환경에서, 이런 기억을 품고 자랐구나 하며,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본다.


지나온 공간 중에는 여전히 직면하기 힘든 곳도 있다. 과거에는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제는 그 시간을 견딜 만큼 단단해졌다고 느껴질 때에야 나는 그곳을 다시 찾는다. 서울에 처음 상경해 두 달 남짓 살았던 고시원도 그런 장소다. 비좁고,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던 방. 그곳은 나에게 차갑고 버거운 공간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먼저 떠오른다. 그 근처를 다시 걷기까지 십 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때는 그랬었지.’
그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비로소 그곳을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시절이었다면, 그 공간을 다시 마주하는 일은 분명 버거웠을 것이다.




지나온 공간을 다시 걷는다는 건,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건물을 바라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곳에 들어서면 당시의 감정과 기억이 함께 올라온다. 바쁜 일상 속에서 애써 외면했던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고, 조용히 정리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기보다는, ‘그때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구나’, ‘여전한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들이 뒤엉킨다. 그렇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자연스럽게 이어 붙여본다. 그 공간에 서 있으면,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지가 선명해진다. 지나온 시간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고, 지금의 나와 연결시키는 일이다.


언젠가부터는 시간이 담긴 공간에 친밀한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도 좋아졌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로, 그저 그곳을 함께 걷는 일. ‘내 지난 시간은 이랬어’라고 조용히 보여주는 일.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과거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다. 반대로, 누군가의 과거가 머물렀던 공간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다. 그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서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지나간 공간을 훑고 돌아오는 날이면, 마음 한구석이 정돈된 느낌이 든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 지금에서야 이해되고, 잊고 지냈던 소중한 기억들이 조용히 떠오른다. 그렇게 나는 과거를 정리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온 흔적을 따라 걸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나를 잃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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