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함 자체보다 '나만' 억울할 때 불행해진다.

by 담하

나는 휴가 계획을 비교적 일찍 세우는 편이다. 비행편은 미리 예매해야 저렴하고, 숙소도 서둘러 알아봐야 마음에 드는 곳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반년 뒤의 여행을 떠올리며 차분히 일정을 정리했고, 비행편까지 무리 없이 예약을 마쳤다. 그 뒤로는 여행을 기다리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친구와 같은 휴양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날짜는 정확히 같지 않았지만 1~2주 정도 차이가 났고, 주말을 끼고 있다는 점까지 닮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여행 정보를 이것저것 주고받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예약한 비행편이 친구의 것보다 꽤 비쌌던 것이다. 친구는 나와 비슷한 시기, 아니 오히려 나보다 늦게 예매했음에도 특가 항공권을 잘 맞춰 구매했다고 했다.


그 순간 ‘나만 손해 본 것 같다’는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나름대로 여러 사이트를 비교하고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이었는데, 결과만 놓고 보면 비싸게 산 셈이 되어버렸다. 애써 한 선택이 허사가 된 것 같아 허무했고, 억울하다는 감정이 따라왔다.


문득 사람의 감정이란 게 참 얄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나는 충분히 합리적인 소비를 했다고 믿고 있었고,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손해를 봤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마음이 이렇게 변하다니. 그런 나 자신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원래도 그랬다. 비싼 물건을 충분히 고민한 끝에 샀다면, 설령 값이 나가더라도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물건을 남들보다 ‘나만’ 비싸게 샀다는 사실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왜 타인이 기준이 되는 걸까. 어쩌면 나는 부당함 자체보다도 ‘불균형’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기보다 “왜 하필 나만?”이라는 생각이 들 때, 감정은 훨씬 크게 요동쳤다.


이 감정은 물건을 살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 비용에 비해 누군가는 더 적은 책임으로 더 많은 이득을 얻는 것처럼 보이면, 나는 그것을 곧바로 손해로 인식하곤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억울함이 따라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비교가 무작위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재벌의 삶과 나를 비교하거나, 전혀 다른 직급의 누군가가 받는 대우와 나를 나란히 놓지는 않는다. 다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고,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과 비교했을 때 내가 덜 대우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억울함은 선명해졌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p.57)』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 키 작은 사람이라 해도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 살면, 키 때문에 쓸데없이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읽으며 비교가 얼마나 상대적인 감정인지 새삼 실감했다. 사람들의 생김새와 삶이 모두 다른 이상, 비교는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타인의 삶이 끊임없이 노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게 되고, 알 필요 없는 정보까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결국 타인의 삶에 대한 과도한 노출은 비교를 키우고, 그만큼 불행도 증폭시킨다.


『불안』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사회적 이동의 희망을 전혀 받아들여주지 않았던 엄격한 계급체계, 솔즈베리의 존과 존 포티스큐가 찬양했던 체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히 정의롭지 못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가장 밑바닥 계급이 속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자유를 주었다. 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성취를 비교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없는 자유였다. 덕분에 그들은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알랭드 보통의 『불안』중에서(p.68)


절대적인 계급사회의 삶이 오히려 더 행복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면, 적어도 개천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덜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가자고 떼를 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비교의 기준을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두기로 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나아졌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해주기로 했다. 내 기준에서 여러 사이트를 전전하며 합리적인 비행편을 골랐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혹여 여행지에서 바가지를 썼다 해도, 일반적인 기준보다 비쌌다 해도, 내가 즐거웠다면 그 경험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세상은 애초에 완전히 공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억울함에 오래 머무는 쪽이 오히려 더 큰 손해일지도 모른다. 실제 손해보다 감정 손해가 훨씬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나만의 규칙을 만들어보려 한다. 되돌릴 수 있는 손해라면 말하고, 따지고, 구조를 바꾸는 데 에너지를 쓴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라면 “공평했어야 한다”는 기준을 내려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시간에 붙잡혀 계속해서 나만 잃게 될 테니까.



이전 17화‘임시’의 삶은 행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