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햇살을 닮은, 가을 단풍을 닮은 작은 아기 스웨터 뜨기
집 앞에 꽃나무가 피어날 무렵 태어난 둘째 지안이가 백일 정도 되었을 때, 첫째 이안이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매일 유치원에 다니던 이안이가 5주가량 집에서 가만히 놀고만 있을 수 없어 등록하게 된 줄넘기 수업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매일 한 시간씩 진행되었다. 이안이가 수업에 간 동안 같은 건물 1층 카페에서 대기하며 짧은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 밀린 집안일을 할 수도 없고 바느질거리를 챙겨 와 스타벅스 테이블에 펼쳐놓을 수도 없었다. 결국 더운 계절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는 대바늘과 털실을 집어 들었다. 역시 짧은 자투리 시간에 하기 좋은 것이 뜨개질이다.
무엇을 뜰까 고민하다가 이안이가 줄넘기 학원에 갈 동안 이모님 손에 맡겨져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지안이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는 추운 계절에 입힐 스웨터를 뜨려고 쁘띠니트(petite knit)에서 만든 도안을 출력하고 게이지에 맞는 실 두 타래와 대바늘을 준비했다. 겨울이 와도 돌이 채 되지 않을 지안이에게 맞는 치수를 가늠하다 보니 문득 실 한 타래에서 한 타래 반 정도면 스웨터를 완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런히 감긴 손바닥 만한 실타래가 수 백번 실을 걸고 빼는 과정을 거치면 아이 몸을 전부 가릴 만한 스웨터가 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시작코를 잡는 것도 지금까지 만들었던 뜨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수만으로 할 수 있었다. 문득 뜨개를 시작하고 나서 이렇게 작은 아기 스웨터는 떠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쁘띠니트의 앵커스 스웨터는 탑다운(목둘레부터 뜨기 시작해 몸통으로 내려가는) 형식으로 요크 부분에 코 늘림을 하며 어깨선까지 뜨게 되어있다. 간결한 무늬가 줄지어 내려가며 점점 스웨터의 형태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 즐거워 단숨에 어깨선까지 떠내려 갔지만, 지루한 메리야스 뜨기로 몸통을 떠야 하는 순간이 오니 손이 주춤해지다 마침내 이안이의 개학과 동시에 작업은 멈췄다. 손이 멈춘 것은 단순히 뜨개에 흥미를 잃어서 뿐만이 아니었다. 백일의 기적을 바랐건만 나날이 더 힘들어지는 육아에 지치기도 했다. 아무리 작은 크기의 스웨터라도 막상 갓난아이를 키우며 뜨개를 하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이기 때문에 더 수월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주변에 둘째를 키우는 엄마들이 동생은 눕혀만 놓아도 알아서 뒹굴 거리다 잠든다느니 순해서 집 안에 있는 줄도 모르겠다느니 자기 먹을 건 야무지게 챙겨 먹는 먹성 좋은 아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누구도 둘째가 첫째만큼 예민하고 잠도 잘 안 자며 귀가 초능력자만큼 밝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안이가 아기 시절 내 품에서 떨어지기만 해도 불안해하며 울고 주변 환경에 대한 긴장도가 높았으며 잘 먹기도 않는 예민한 아이라고 생각했기에 둘째는 좀 무던하고 잘 먹는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다행히 지안이는 먹는 거로 내 속을 태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달라고 우는 일이 많았다. 배가 고프면 잠시도 참지 못하고 우렁차게 울었고 분유를 타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젖병을 조립하다가 손에서 놓치기 일쑤 었다. 기저귀가 조금만 젖어도 울었고 심지어 소변을 싸기 전부터 불쾌하다는 듯이 울었다. 이안이는 어릴 적 울음소리가 작아서 방문을 닫아 놓으면 거실에서는 그 소리가 희미하게 들릴까 말까 했는데 그마저도 자주 우는 아기가 아니었다. 벽 두 개는 가뿐히 뚫고 나오는 지안이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난생처음 이웃에서 민원이 들어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가장 큰 고난은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오열하며 잠투정하는 지안이를 달래는 것이었다. 안아주고 부드럽게 말을 걸어도 울음을 멈추지 않으며 악을 쓰고 버둥거리는 아기를 안고 세 시간 동안 집안 곳곳을 걸어 다니며 달래주다 보면 어느새 아이는 제풀에 지쳐 잠이 들고 내 몸은 혹사당한 것처럼 욱신거렸다. 잠투정하는 아이가 있다고 듣기는 했어도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처음이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아진다는 주변의 위로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기의 몸무게는 나날이 늘어가는데 잠투정을 하는 시간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니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나갈 지경이었다. 문득이 이안이는 잘 안 먹고 예민하긴 했어도 잘 자는 순한 아이였구나 하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먹성과 수면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이안이와 지안이는 형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성향이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심지어 외모적으로도 둘은 닮지 않았는데 지안이는 믿기지 않을 만큼 피부가 하얗고 몸은 귀여울 만큼 통통했다. 내 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그 둘의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경력자의 마음으로 둘째를 키우려던 나는 어느새 다시 처음부터 배워나가는 초심자의 마음으로 지안이를 대하게 되었다.
이안이의 방학이 끝난 이후로 손을 놓고 있던 뜨개 물을 다시 집어 든 것은 어느새 찬 바람이 부는 초가을이 되었을 때이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지안이를 보며 완성을 서둘러야 추운 계절에 잠깐이라도 입힐 수 있을 것 같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한 치수 크게 뜨기 시작했지만 언제나 아이의 성장 그래프에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항상 그래프 밑으로 자란 이안이와는 달리 지안이는 벌써 본인의 개월 수에 맞는 평균 몸무게를 훌쩍 뛰어넘었다. 서둘러 몸통 부분을 떠나가며 작은 스웨터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자니 부드럽고 말랑한 지안이를 안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작고 부드럽다는 점 이외에도 스웨터는 아기를 닮았다. 지안이가 이 세상 둘도 없는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같은 도안과 동일한 실로 뜨개를 해도 개개인의 손 힘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지니 그 스웨터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양육하는 것은 마치 스웨터 몸통 부분의 메리야스 뜨기처럼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반복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묵묵히 해야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나 스스로 만족하는 것 이외에 남들에게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무의미하고 완성 후 그 결과는 오로지 아이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내가 기껏 완성한 스웨터를 아이가 거부하더라도 마음 상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내가 공들여 키웠어도 아이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을 부모는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작은 스웨터를 떠가며 다음 계절에는 지안이가 이 스웨터를 입을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이 아깝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지금은 배를 채우고 트림하고 잠을 자는 그 모든 순간에 엄마인 나의 손을 필요로 하지만 아이가 조금만 크면 스스로 결정하고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지안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밤새 책상 앞에서 홀로 공부할 때 나는 그 옆에서 묵묵히 뜨개질을 하며 같은 시간을 먼발치에서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는 사랑스러운 노란 스웨터를 입었던 작은 아기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쩍 큰 성인이 되는 지안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가을에 어울리는 스웨터를 완성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