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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박 Oct 25. 2022

땋은 머리 자수실

이론보다 중요한 자수를 하고 싶은 마음


촘촘한 리투아니아산 리넨 원단에 야생화 자수를 놓고 있자니 예전에 취미로 자수를 배울 때 수성펜으로 투박하게 그린 도안 위에 수틀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더듬더듬 수를 연습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당시 나는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며 퇴근 후 자수 숙제를 하고 주말에는 자수 수업을 듣고 있었다. 약 3개월 동안 매주 하루도 빠짐없이 귀한 토요일을 할애해가며 고급반 과정까지 마쳤을 때, 나는 자수가 그저 스트레스 해소용 취미가 아닌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 분야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취미로 배운 자수는 도안 옮기는 방법부터 매듭짓는 방법까지 전문가 과정에서 배우는 자수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부담 없이 자수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초반에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며 입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몇 년 후 결혼을 하고 출산 계획을 세울 때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평생 가져갈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그때 자수라는 길이 없었다면 나는 쉽게 퇴사를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토츠카 사다코 (2007), 『리넨에 허브 꽃자수』, 일본:啓佑社.


나는 2017년 퇴사 후 본격적으로 일본 보그 수예협회의 커리큘럼으로 자수 자격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재미 삼아 놓는 작은 자수라도 예전에 취미생활을 할 때의 습관을 버리고 번거롭지만 완성도 높은 수를 놓기 위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야생화 자수는 토츠카 사다코 작가의 작품인데 언뜻 보기에는 복잡해 보이는 도안이지만 기초적인 자수 기법만 활용할 수 있으면 누구나 결과물을 완성해낼 수 있다. 다섯 종류의 식물(산딸기, 카모마일, 제비꽃, 네스트리움, 차이브)이 원작자의 의도에 따라 각각 체크무늬, 줄무늬, 무지 리넨 등 다양한 종류의 원단에 수 놓여 있어서 식물의 디자인과 원단과의 조화를 찾는 재미도 있다. 국내에서 프랑스 자수로 널리 알려진 자수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꽃 자수 일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꽃 자수와는 달리 토츠카 작가의 작품은 식물의 뿌리까지 그려져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화려한 꽃 아래 숨겨진 뿌리처럼 우아해 보이는 자수를 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조금은 지루하지만 중요한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우선 자수의 바탕이 될 천을 준비한다. 직물의 재질, 색감, 그리고 밀도까지 모두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대충 아무 천이나 고른다면 기껏 공을 들여 자수를 놓아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 한 땀씩 놓는 자수는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기 때문에 되도록 리넨이나 코튼 소재의 고급스러운 천을 사용하는 것이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 중 하나이다. 디자인이 섬세하면 촘촘한 밀도의 천이 좋고, 십자수처럼 가닥가닥 올을 세며 수를 놓는다면 카운트 자수용으로 만들어진 천이 좋겠다. 

   


처음 천을 펼치면 마치 백지 도화지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당혹감이 들 수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우선 만들고자 하는 완성품의 용도와 크기를 가늠해보는 것이 좋다. 자수가 놓인 파우치를 만들지 아니면 작품처럼 액자에 끼울지에 따라 필요한 시접의 치수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천을 앞서 가늠한 크기보다는 조금 여유 있게 재단하고 테두리를 감침질하여 자수 도중 원단의 올이 풀리지 않도록 한다. 그다음에 자수가 올라갈 위치에 도안을 옮기면 반쯤 준비는 마친 셈이다.



원단의 테두리를 감침질 한 모습


도안을 옮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1. 천 위에 수성펜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법

2. 도안을 투사지에 그린 뒤 수놓을 천, 먹지, 투사지, 투명 비닐을 차례로 겹친 후 펜촉이나 철필처럼 끝이 둥근 도구로 도안을 따라 그리는 방법

3. 도안을 수용성 심지에 그린 후 수놓을 천에 시침질하고 자수가 끝나면 심지를 세탁하여 녹이는 방법



2번 설명대로 도안을 옮기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 도안이 그려진 투사지, 수놓을 원단, 먹지, 철필
먹지를 깔고 도안을 철필로 꾹 눌러가며 도안을 옮길 때, 투명 비닐을 제일 위에 대고 그리면 투사지가 찢어지지 않는다


1번의 방법은 자칫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덧그리게 되면 원단이 지저분해질 수 있다. 그리고 수를 완성한 후 도안을 지우기 위해 세탁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반면, 2번의 경우 시작하기 전에는 번거롭게 느껴지는 대신 원본과 가장 유사하게 도안을 옮길 수 있다. 3번의 경우에는 먹지와 철필로 도안을 옮기기 부적절한 스웨터나 요철이 있는 원단에 도안을 옮길 때 유용하다. 나는 주로 2번의 방법으로 도안을 옮긴다.

   


천에 도안을 옮긴 후 이제 어디서부터, 어떤 기법으로, 무슨 색의 실을 몇 가닥 사용해서 자수를 놓으면 좋을지 결정하면 되는데 원작 도안을 보면 설명이 되어있다. 가전제품을 사면 동봉된 복잡한 설명서처럼 지루해 보일 수 있지만 빨리 제품을 개봉해서 사용부터 해보고 싶은 마음을 누그러트리고 각 그림 옆에 화살표로 쓰여있는 아래와 같은 설명을 찾아보면 된다.


자수 기법 명, 자수실 색상 번호(실 가닥 수) 

→예: 체인 다이닝 S 701(2) 


해석을 하자면, 도안에서 화살표가 표시하는 부분을 체인 다이닝 스티치(S는 스티치의 약자) 기법으로 701번 색상 실 두 가닥을 가지고 시작하면 된다. 

     


'자, 이제 실을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잘 시작하면 된다'라고 적으면 마치 불친절한 요리 교과서에서 '감자 한 개를 적당한 불에 볶아 주다가 소금을 조금 넣어 줍니다’'와 같이 알쏭달쏭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실은 적당한 길이로 자르는 것이 좋다. 너무 짧게 자르면 자주 실을 교체해야 해서 번거롭고, 너무 길게 자르면 수놓는 중간에 실이 엉키기도 한다. 도안의 크기에 따라서 다르지만 나는 보통 30~60센티로 잘라서 사용한다. 

   


드디어 첫 땀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내가 취미 자수를 배울 때는 바늘에 실을 꿰고 실 끝에 똥글뱅이 매듭을 만들어서 시작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한 끗 차이가 나는 매듭 방법을 소개한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아래의 방법으로 매듭을 지으면 자수 뒷면도 깔끔할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에 똥글뱅이 매듭의 뭉친 부분이 없어서 전반적인 완성도가 높아진다. 

   


우선 첫 땀을 놓기 전 5센티 정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바늘을 넣고, 실을 조금 남겨둔 채 첫 땀을 시작하는 위치로 바늘을 뺀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수를 부분적으로 완성한 후 처음에 남겨둔 실을 뒷면으로 빼서 다른 땀에 두 세코 감아 되돌아오기를 반복한 후 남은 실을 절단한다. 시작과 끝의 모든 매듭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무리하면, 공들여 완성한 자수의 투박한 매듭이 부끄러워 뒷면을 가리는 액자로 만들거나 뒤 지로 다른 천을 덧대어 마무리하지 않아도 당당하게 뒷면을 뽐내며 사방의 테두리만 깔끔하게 마무리해서 홀 겹의 가벼운 덮개로 사용이 가능하다. 


원단의 앞 면, 첫 땀을 시작할 때 실을 여유롭게 남기고 시작한다
원단의 뒷 면, 시작과 끝에 남겨둔 실을 바늘땀에 두세 번 감아서 고정하면 매듭이 없는 마무리가 된다
매듭이 없이 정갈하게 마무리된 원단의 뒷 면


여기까지가 본격적인 자수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과정이다. 만약 내가 처음 자수를 시작할 때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첫 땀을 떠야 한다고 알았으면 그냥 아름다운 자수 책을 그림책 보듯이 구경만 하고 직접 자수를 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자수를 처음 시작할 때는 초등학교 4학년 특별활동 시간으로 위와 같은 어려운 과정 없이 그냥 아무 천에다 내 마음대로 똥글뱅이 매듭을 있는 힘껏 크게 만들어서 러닝 스티치(라고 자수 책에는 나와 있지만 그냥 박음질로 직선 박기에 더 가까운)로 선을 수놓는 시간이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자면 나는 어른이 되어서 취미로 자수를 배울 때에도 자수실을 보빈에 감아 가지런히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배운 방법 그대로 집에 있는 자수실을 몽땅 꺼내어 60센티 길이로 자른 후 머리 땋듯이 땋아 양 끝을 고무줄로 묶고 다녔다. 아무 천이나 골라 대충 밑그림을 그린 다음 이렇게 땋아놓은 자수실 묶음에서 한 가닥씩 실을 뽑아 마음 내키는 대로 자수를 놓았다 (자수실에는 고유의 색을 표시하는 번호가 있는데, 이렇게 땋아서 보관한 자수 실은 번호로 색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도안을 보며 원작을 충실히 따라 하는 자수를 할 때에는 불편한 점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든 땋은 머리 자수실뭉치


세상에는 무궁무진한 자수 원단과 수입 실과 희귀한 도안이 있고, 나라별로 자수의 전통과 역사를 알고 나

면 비로소 내가 가볍게 첫발을 내디딘 이 분야가 사실은 내 평생을 바쳐 공부해도 끝이 나지 않을 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수틀을 사용하지 않고도 천이 울지 않게 조절하며 능숙하게 수를 놓을 수 있게 된 지금도 가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만큼 진흙에 발이 빠진 느낌이 들 때 나는 땋아놓은 자수실 뭉탱이를 끄집어낸다. 천을 신중히 고르는 것도 도안을 먹지와 철필로 옮기는 것도 다 귀찮게 느껴지는 그런 무기력한 날에는 정갈한 자수의 마무리 따위 무시하고 간단하게 수성펜으로 도안을 그린 다음 실 끝에는 아무렇게나 똥글맹이 매듭을 짓고서라도 우선 시작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그러니 여러분들 아무 색깔이나 눈대중으로 골라서 한 가닥 쉽게 뽑아 쓰는 땋은 머리 자수 실처럼 자유롭게 첫 땀을 시작해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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