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에게나 맞는 뒤꿈치가 없는 양말 뜨기
여행을 떠날 때 누군가는 '혹시 모르니...' 책을 챙겨가곤 하지만 나는 가벼운 파우치에 실 한 볼과 얇은 장갑 바늘을 챙겨 가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 뜨개 양말을 여행지에서 완성해서 신고 다닌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나중에 집에 돌아와 양말 서랍을 열어보면 로마 양말, 뉴욕 양말, 런던 양말 등 여행을 추억할 만한 기념품으로 직접 뜬 양말이 차곡차곡 쌓여 갈 테니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얇은 실과 가느다란 다섯 개의 장갑 바늘로 양말을 직접 떠보겠다는 생각을 선뜻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어쩌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 20대에는 여행길에 오를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털실과 대바늘 대신 읽지도 않을 책을 챙겨 다니다 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나는 30대가 되어 장거리 여행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한 곳에 메어 있는 삶을 살 게 되었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갔다가 퇴근하곤 집에 와서 청소와 빨래를 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눈에 띄는 성장도 손에 잡히는 성과도 없이 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여행길에 추억이 될만한 작은 기념품은커녕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서 곱씹어 볼 만한 결실 하나 없는 삶이라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 이상 양말 뜨기에 대한 계획을 미루지 않기 위해 당장 뜨개 단기 수업을 끊어서 배우러 다녔다. 단단히 각오하고 배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양말 뜨기는 그 당시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과제여서 한 짝을 겨우 완성하고 나면 다시 처음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잊어버리곤 했다.
초등학교 2학년 특별활동 시간에 대바늘로 처음 목도리를 완성한 순간부터 뜨개질은 나에게 코를 빠트리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을 때 만족감을 안겨주는 뜀틀 뛰기 같았다. 학창 시절에도 유학 중에도 그리고 취업을 하고 나서도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땐 틈틈이 뜨개로 도피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나의 뜨개 실력이 늘거나 꾸준히 완성품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는데, 그런 내가 뜨개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인 것은 첫 아이 이안이를 낳고 나서이다. 그동안 수신자가 없는 선물을 발송하던 내게 드디어 선물을 받을 대상이 생긴 것이다. 임신 소식을 듣고 보통의 임산부들은 첫 쇼핑으로 아기 신발을 고를 때 나는 뜨개 선생님을 찾아가 대바늘과 코바늘로 아기용품 만드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기를 낳고 정신없는 육아 중에도 틈틈이 뜨개로 도피를 하던 나는 과거에 도전했다가 포기해버린 양말 뜨기에 대해서는 잊은 채 비교적 쉬운 아기 모자나 소품을 뜨며 작은 성취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나의 양말 뜨기에 대한 열정은 한 짝만 완성한 양말을 마지막으로 내 마음속 서랍 어딘가에서 침묵하며 잠자고 있었다. 한 번 경험해본 것으로 만족하며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양말 뜨는 도안을 꺼내 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읽어보니 장님이 하루아침에 눈을 뜨듯이 그동안 이해가 가지 않던 도안이 술술 읽히기 시작했다. 처음 양말 뜨기에 도전한 지 2년 만에 생긴 일이다. 생각해 보니 양말 뜨기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던 소품 뜨기라도 원형 뜨기, 경사 뜨기, 코 줄이기, 코 줍기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여 뜨개를 꾸준히 하다 보니 그 능력치가 쌓여서 예전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던 양말 도안이 읽히기 시작한 것 같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년 겨울마다 아이의 양말을 떠주고 있다. 작년에는 아이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실을 모아 발목은 갈색, 뒤꿈치는 파란색, 앞 코는 주황색의 귀여운 양말을 완성하였다.
나는 항상 양말 뜨기가 뜨개의 꽃이라고 여겼다. 크기는 작지만 모든 뜨개 기법이 총망라되어있기 때문이다. 발목, 뒤꿈치, 발등과 발바닥, 그리고 앞코로 구성된 뜨개 양말은 각 위치마다 기능적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이 쓰인다. 신축성 있는 발목을 위해 고무 뜨기, 뒤꿈치는 쉽게 헤지지 않게 두 겹으로 도톰하게 힐 플랩(heel flap), 높은 발등을 감싸기 위해 중간에 거싯(gusset)을 넣고 발 둘레는 원형 뜨기로 발 길이만큼 뜬 다음, 앞 코는 코 줄이기를 하며 코를 막아 준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이렇게 많은 단계를 거쳐 양말을 만들 수 있을 만큼 평화롭지 않다. 불확실함 속에 복잡한 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겉뜨기와 안뜨기만 반복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때 하기 좋은 것이 스파이럴 양말 뜨기이다.
보통의 양말과는 다르게 스파이럴 양말 뜨기는 뒤꿈치 만드는 과정이 없어서 원형 뜨기로 겉뜨기와 안뜨기만 반복하며 나선형 무늬(spiral)를 짜다 보면 신축성 있는 양말이 완성된다. 정해진 뒤꿈치가 없다는 사실은 발 사이즈와 상관없이 누구나 신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는 사람의 발 크기가 작으면 종아리까지 오는 긴 양말이 되기도 하고 발이 큰 사람에게는 발목까지 오는 짧은 양말이 되기도 하는 신기한 양말이다. 겉뜨기 4번과 안뜨기 2번을 반복하는 아래와 같은 패턴을 따르며 6단마다 한 코씩 엇갈리게 떠나가면 되니 발 둘레가 넓거나 종아리가 굵은 사람은 시작 첫 코를 6의 배수로 늘려가며 얼마든지 자신에게 맞는 양말을 뜰 수 있다.
1단 :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
2단 :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
3단 :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
4단 :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
5단 :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
6단 :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
7단 :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
8단 :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
9단 :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
10단 :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
11단 :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
12단 :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
13단 :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
14단 :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
15단 :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겉 겉 겉 겉 안 안 ...
위의 패턴을 반복하며 원하는 길이가 될 때까지 뜨다가
코줄임을 하며 앞코를 막아주면 완성
(겉: 겉뜨기 / 안: 안뜨기)
양말 뜨기를 막 처음 배우던 시절 몇 번 좌절을 맛본 이후 의기소침해진 내가 시작했던 것이 이 스파이럴 양말이다. 하지만 양말 뜨기가 가능해진 지금 매년 새로운 양말을 뜨느라 뒷전이 되어 몇 년째 미완성 바구니에 있는 것을 이제야 꺼내 본다. 스파이럴 양말의 장점이자 지금까지 완성을 못 한 치명적 단점이 이 단조로운 기법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색의 실보다는 다채로운 색으로 염색된 염색 실을 사용하는 것이 덜 지루하다. 내가 고른 실은 뜨거운 태양의 노랑빛이 나왔다가 갑자기 모래사막의 갈색이 나오기도 하고 깊은 바다의 새파란 색이 보이다가 은은한 강가의 하늘색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면 좋은 사실은 바로 스파이럴 양말은 되도록 동시에 양말 두 짝을 뜨기 시작하는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복잡한 도안에 집중하며 단숨에 떠버리는 뒤꿈치가 있는 양말과는 달리 스파이럴 양말은 가방에 항상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뜨기에 좋기 때문에 단조로운 기법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한쪽을 완성하고 나면 다른 쪽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데 주춤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두 짝을 가지고 다니며 사이좋게 번갈아 뜨다 보면 어느새 기다란 스파이럴 양말이 완성될 것이다. 인내심 있게 양말 두 짝을 뜨고 나면 발 크기가 다른 온 가족(작은 아기는 같이 못 신으니 따로 하나 떠주자! 크기가 작으니 금방 완성될 것이다)이 함께 신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양말의 장점이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에게나 맞는 마음씨 좋은 스파이럴 양말! 완성하고 나니 산타 양말처럼 거대해 보여도 놀라지 마시라, 그 정도 되어야 신어보면 종아리까지 오는 따듯한 겨울 양말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