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없는 장보기는 꿈이 아니었음을
집에서 가져온 공병과 천주머니가 재사용 가능한 장바구니에 가득 들어있다. 쌀부터 파스타, 과자 같은 건조식품과 참기름, 식초 같은 액체, 그리고 유기농산품과 공산품까지, 모든 제품들은 포장되어있지 않다. 다들 알아서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거다. 물론 영수증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주지 않는 게 기본이다.
한국은 제로웨이스트의 불모지라 생각하며 괴로워하던 입문자 시절, 나는 호주로 떠났고, 그곳에서 1년을 살았다. 위와 같은 형태의 가게는 'package free shop' 또는 'bulk shop'이라고 불린다. 한국에는 손꼽을 정도로 적은 벌크 샵이, 호주에는 동네마다 있었다. 심지어 어떤 동네는 네다섯 개의 벌크 샵이 몰려있기도 했다.
벌크샵은 늘 붐볐다. 사람들은 퇴근길에 들려 종이봉투에 과자를 담아가기도 하고, 주말에 공병과 천주머니를 가득 가져와 장을 보기도 했다. 여긴 제로웨이스트를 학교에서 따로 가르쳐주나 싶을 정도로 모두가 자연스러웠다. 이런 곳이 생긴 지 10년도 훨씬 더 되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첫 패키지프리샵은 2014년 독일에서 생겼다고 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5년 만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다는 것은 한국도 충분히 의미 있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1년 동안 제로웨이스터의 천국에 살면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플라스틱 없이 물건을 사고 장보는 것이 가능하며, 일회용품없이 1년을 살아가는 게 허황된 말이 아니라 정말로 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덕분에 이제는 이런 천국에 살지 않아도, 어디서든 플라스틱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힙한 제로웨이스터가 되었다.
제로웨이스트 쇼핑이 가능한 곳은 벌크샵뿐만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쓰레기를 만들어내지 않고도 장을 볼 수 있었다. 일반 마트에서도 재활용 가능한 장바구니를 적극 권장하며, 사람들은 그 장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사기도, 때로는 피크닉에 가져가기도 한다. 비닐 대신 종이봉투가 준비되어있으며, 웬만한 과일이나 채소는 비닐에 담지 않고 그대로 장바구니로 직행한다. 대부분의 과일과 채소들이 플라스틱으로 포장되어있지 않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영수증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영수증은 따로 인쇄되지 않는다. 모든 카드 기계나 POS에는 영수증이 인쇄되지 않는 것이 기본 설정인 것이다. 체인점 마트의 셀프 체크 계산대는 예외로, 일정 금액 이상 결제하면 영수증이 자동으로 인쇄되어 나를 슬프게 했지만.
야채나 과일의 무게를 잴 때 나오는 스티커도 없다. 계산대나 셀프 체크의 바코드 찍는 곳에 올려두면, 자동으로 무게를 잴 수 있기 때문이다.
'천주머니에 담아 가는 것 때문에 좀도둑으로 의심되면 어떡하지'라는 망상을 잠시 한 적도 있다. 워낙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제로웨이스터들 덕인지, 크게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갈 때 계산만 똑바로 한다면 천주머니에 넣든 종이에 싸서 가져가든 아무 상관하지 않는다. 1년을 다 채워갈 때쯤엔, 손수건에 스콘을 담아가고, 푸드트럭에서 도넛을 맨손에 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처음 호주에 갔을 땐, 한중일 이 세 국가를 제외하곤 아이스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아이스커피를 종이컵에 주는 것에 두 번 놀라고, 뚜껑과 빨대를 기본으로 주지 않는 것에 세 번 놀랐다. 물론 여전히 플라스틱 컵과 뚜껑을 쓰는 카페도 많다.
그래서 그들은 Keep cup이라고하는, 작은 reusable 컵을 텀블러 대용으로 들고 다닌다. 날씨가 춥든 덥든 뜨거운 커피만 마시니, 커다란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꼭 체인점 카페가 아니어도, 대부분의 카페에서 킵컵 할인을 받을 수 있다. 킵컵 대신, 집 또는 직장에서 머그컵을 그대로 들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제로웨이스트에 친화적인 카페가 아니라면, 고객이 먼저 뚜껑 없이, 또는 종이컵에 요청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워낙 커스터마이징에 관대한 곳이긴 하지만,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고요'라는 말과 그 요청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배울만하다고 느꼈다.
제로웨이스터의 천국에서 포장지 없는 쇼핑은 비단 식료품과 커피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술 마시러 갔다가 제로웨이스트를 만나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집 근처 보틀샵에 갔다가 공병에 와인, 맥주를 담아갈 수 있는 신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한국과는 다르게 편의점, 마트에서 술을 구매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보틀샵만이 유일하게 음주인을 구원해주는 곳이다.)
맥주나 와인은 병 또는 캔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재활용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다운사이클링(원래보다 가치가 낮은 것으로 재활용되는 것)이 아닐까 늘 의심했던 나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곳이었다. 보틀샵과 카페처럼, 어디에서든 '제로웨이스트'를 의식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예전에 한국에서 대나무 칫솔을 시켰는데 플라스틱 포장재가 같이 와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플라스틱을 줄이려고 대나무 칫솔을 샀는데 엉뚱한 곳에서 플라스틱이 튀어나온 셈이다. 호주에서는 다행히도 같은 일을 경험할 일이 없었다. '에코'를 지향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플라스틱 제로 택배 포장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한 제로웨이스트 쇼핑몰에서는 모든 신문지와 종이들은 커뮤니티, 즉 주변 이웃이나 카페, 식당의 협조로 받아온 것을 재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주문한 것 중에 얇은 유리병으로 된 제품도 있었는데, 플라스틱 포장재는 일체 쓰이지 않았다. 종이로 몇 번 감싸고, 신문지를 뽁뽁이 대신 넣어 종이테이프로 마무리한, 그야말로 완벽한 플라스틱 프리 택배였다.
일반 쇼핑몰에서도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포장재를 넣지 않았다. 와인을 세병인가 시켰을 때였는데, 종이 패키지 자체가 와인병이 깨지지 않게 디자인되어있었다. 이것이 택배 포장의 미래이자 자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여름, 선크림의 계절이 돌아왔다. 제로웨이스트는 플라스틱과 자외선을 동시에 피하기 위해 끝없이 고민한다. 나는 단 한 번도 플라스틱이 쓰이지 않은 자외선 차단제를 본 적이 없다. 호주에 오고서야 자외선 차단제가 플라스틱 용기가 아닌 곳에 담길 수 있다는 것, 또 우리가 DIY로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찾아보니 자외선 차단제, 데오드란트부터 치약까지 그 어떤 제품이든 플라스틱 프리 버전이 존재했다. 아니면 벌크샵에서 각종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들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쓰레기 제로! 제로웨이스트에는 한계가 없다.
제로웨이스터의 교과서, <나는 쓰레기 없이 산다>의 저자인 비 존슨은 '기업을 변화시키는 자는 소비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지내고 있는 요즘에도 당연한 듯 천주머니를 들고 쇼핑하고, 플라스틱은 거절한다. 체인점 마트든, 시장이든, 카페든 가차 없다.
이 글을 읽고, 언제쯤 저렇게 될까 부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저런 벌크샵이 많아지면 그땐 나도 제로웨이스트를 하겠다는 또 하나의 핑계를 추가하지 말자. 마치 한국은 태초부터 제로웨이스터의 천국이었던 것처럼 행동해보자.
기업에 선택을 강요당하기보다,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요구한다면 한국도 점차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위 이야기도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될 날이 올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