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내가 프로 시간낭비러였다니
내 친구는 야심차게 <미라클 모닝>을 읽고도 수년간 정오에 일어났다. 놀랍지도 않다. 나도 올해 5권이 넘는 시간관리 책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졌지만 거기서 그만이었으니까. 왜 수많은 자기계발책, 그중에서도 시간관리 책들은 읽고 나서 그 내용이 공중분해되는 것일까? 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러가고, 새어나가는 시간들을 잡기 위해 시간을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방법으로 시간을 기록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노트에 손으로 적기도 하고, 이북리더기에 터치펜으로, 마지막엔 각종 time tracking 어플까지 써봤다. 모든 방법은 작심 7일이었고, 나는 시간을 기록하기엔 너무 게으르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시간관리를 위해 시작한 time tracking에 오히려 더 시간이 들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여태까지 써왔던 방법들은 반드시 그 디바이스에서만 기록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시간을 기록하려면 매시 매분마다 노트를 꺼내고, 밥 먹으려다 이북리더기를 가지러 가야 했다. 나는 개인용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30분도 안 되는 날이 허다하기 때문에, 시간 하나 기록하자고 이렇게 핸드폰을 늘 눈앞에 둬야 하나 싶었다. 아, 이래서 사이코가 되는 기분이 들지 않게 time tracking을 하는 방법까지 나와있는 건가.
그러던 내가 한 달 넘게 캘린더 기본 앱으로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드디어 time tracking 방법에 정착한 것이다. 축하해달라. 초반에는 마치 내 게으름이 모두 까발려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여기저기로 새어나가는 시간을 보며 허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선은 늘 문제점을 찾는 데에서 시작하는 법. 한 달이 지난 지금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하루에 가까워진 삶을 살고 있다. 캘린더 덕분에 살았어요.
나는 Matt d'avella가 캘린더로 time tracking을 하는 영상을 보고 이 방법을 시작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카테고리를 정하고 일정을 집어넣듯이 매일의 시간을 기록하면 된다.
나는 주로 맥북의 기본 캘린더를 사용한다. 하루 중 맥북을 끼고사는 시간이 많기도 하고, PC버전이 조작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글 캘린더도 비슷한 기능들을 갖고 있다.
캘린더 앱은 내가 그동안 사용해왔던 시간관리 툴의 3가지 단점을 모두 보완하고 있다. 사용법을 새로 익히지 않아도 되어 편리하고, 시간을 절약해준다는 건 덤이다.
1. 손으로 작성하다 보면 뭉뚱그려 작성하기 마련
2. 직접 작성하거나, 몇몇 어플의 경우 가시성이 좋지 않음
3. 한 가지 디바이스에서만 사용할 수 있고, 접근성이 떨어짐
한 달 동안 캘린더에 시간을 기록하면서 터득한 나만의 팁도 생겼다.
매주 계획을 짤 때 나의 이상적인 시간표를 미리 넣어둔다.
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일정은 '반복 이벤트 설정'보다는 복사 기능을 사용한다. Ctrl + C, Ctrl + V!
복사 기능은 일정 기록에도 활용할 수 있다. 이 기능을 이용하면 일일이 일정마다 타자를 칠 필요가 없다.
규칙은 아니지만 권장하는 사항이다. time tracking 반대론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Work / Study / Reading처럼 생산적인 시간에만 카테고리를 두지 말자. Mindfulness / Self-care처럼 다양한 카테고리를 만들어놓으면 좋다. 24시간 원더우먼처럼 사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카테고리는 10개를 넘지 않도록 한다. 카테고리 고르다가 하루가 다 가는 것처럼 슬픈 일도 없다.
스마트폰과 게임에 Downtime이 있다면, 내 업무시간에도 Downtime이 있어야 한다. 나의 경우 7시 이후에는 모든 공부와 일을 중단하고, 티타임을 가지거나 책을 읽는 등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시간을 가시화하는 것은 나만의 시간관리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의 첫걸음이었다. 나의 시간 사용 패턴이 눈에 보이니, 어떤 시간관리 방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가물가물하던 시간관리 책 속 개념들이 생각났다. 다시 이북리더기를 꺼내 내가 밑줄 쳤던 부분, 핵심 개념들을 다시 정독했다. 지금은 여러 권의 책 속 나에게 맞는 방법만을 골라 적절히 섞어 쓰고 있다. <deep work>의 6시 down time, <Make time>의 Highlight, <신의 시간술>의 기상 후 골든타임 등이 있다. (시간관리 방법은 추후 별도의 콘텐츠로 올릴 예정이다.)
물론 모든 시간관리 방법이 나에게 맞을 리는 없다. 그렇기에 새로운 시간관리 방법을 적용해보고, 그것이 나에게 맞는지 아닌지, 캘린더를 보면서 추적해나간다. 나의 경우, 하루에 여러 가지 일을 나누어 해왔는데, 지금은 하나씩 통째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오늘 코딩 공부를 5시간 하고, 내일 글쓰기를 5시간 하는 식이다. 언어 공부처럼 매일 꾸준히 해야 하는 예외가 존재할 때도 있다.
시간을 기록한 지 2주째, 나는 룸메이트들과 점심을 만들어먹는 것을 그만뒀다. 처음엔 다 같이 만들어먹던 점심이, 어느 순간부터 내가 밥을 해 먹이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요리를 좋아하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이 언젠가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캘린더를 확인했다. 요리와 장보기에만 하루에 3시간을 쓴다는 것을 확인하고, 앞으로의 요리는 나를 위해 일주일에 한두 번 밀프렙을 하기로 했다. 지금은 일주일에 5시간 정도만 요리에 할애하고 있다. 매주 16시간을 아끼고 있다.
시간은 금이라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타인에게 맘껏 퍼준다. 시간에 한해서 인간은 이보다 더 이타적일 수 없다. 커피 기프티콘을 받기 위해 30분, 1시간도 기꺼이 쓰고, 의미 없는 고민을 들어주는 데에 또 1시간을 들인다.
자신의 시간을 돈으로 환산해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지금의 연봉을 시급으로 환산해보도록 하자. 그리고 시간을 기록해보자. 그러다 보면 내 시간의 가치를 재확인하게 된다. 또 내 시간이 낭비되고 잇는 곳은 어디인지도 알 수 있다. 왜 나는 그동안 철저하게 가계부는 써봤으면서, 시간에 대해선 관대했던 것일까. 시간도 결국 돈이며 금이고, 내 재산이었는데 말이다.
요리를 하며 느낀 불편한 마음의 원인을 찾았다. 금과 같은 내 시간이 낭비되고 있음을, 미래에 내 시간의 가치를 더 높여줄 활동에 투자할 기회를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내가 지금 이것에 들이는 시간이 가치 있는 것인가, 에 대해서 항상 의식하게 해 준다.
미루기의 천재는 다윈이 아니라 나였다. 과제하다 분갈이를 하고, 자소서 쓰다 갑자기 배수구 청소를 했다. 지금 당장 분갈이를 하지 않으면 식물이 죽을 수도 있어! 배수구 청소를 하지 않으면 내 위생에 큰 문제가 생긴다고 WHO가 경고했어! (물론 근거 없는 소리다.) 미루기를 위한 나의 변명은 갑자기 과자를 집어먹고, 유튜브를 시청하는 것에서 매년 발전해나갔다.
불과 재작년의 이야기인데 아주 예전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일을 미루지 않는다. 시간을 기록하고 나선 미루는 일이 일체 없어졌다.
나의 사례처럼, 우리는 굳이 사혼의 구슬을 깨뜨려 그 조각을 이곳저곳에 퍼뜨려둔다. 그 조각들을 To do list에 청소, 책 읽기처럼 몇 개씩 넣어두면 꽤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 결국 매일 새어나가는 시간으로 이어지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새어나가는 시간을 막는 행동본부를 세우는 것과 같았다. 예를 들어 화장실 청소는 샤워 후 5분, 10분을 들여 매일 하면 굳이 일정을 잡을 만큼의 큰 일도 아니다. 청구서 처리, 신청 등 잡일은 하루에 모아서 한다. 병원 가는 김에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한 일들도 한 번에 처리한다. 무엇보다 To do list에 중요한 일이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외에는 처음부터 넣지 않는다. 운동과 청소, 책 읽기는 습관 이어야 하지, 중요도가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To do list에 올라가 있으면, 청소가 다른 중요한 일을 방해하는 아주 좋은 변명이 될 수도 있다.
성공하는 시간관리는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 집중할 수 있는 때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혼의 조각이 된 시간을 다시 모아 붙이면 생산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몇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래서 단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다. 내가 생산성 덕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표본도 아니라는 걸 기억해달라. 시간 기록을 통해, 나는 내 생각보다 불안과 스트레스에 취약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늦게 일어나거나 게임에 손을 대기도 했다. (1시간이라도 게임을 하는 날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는 굉장히 큰 일이다.) 그 심각성을 깨닫고 매일 명상을 하거나 나만의 루틴을 견고히 하는 등 여러 방법들을 시도해보고 있다. 이처럼 나에 대해 기록하는 것은 어떤 형태든 나를 잘 알아갈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지금 같은 때일수록 시간관리가 어렵지만, 오히려 시간관리를 연습할 기회이기도 하다. 내 시간을 회사가, 학교가 컨트롤해주길 기대하지 말자. 내 시간을 조정하는 리더는 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