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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Aug 24. 2018

구경거리라고는 죄다 상처들 뿐

오늘 날씨 태풍 지나가고

큰 바람은 볼거리가 된다하여 설레다가 사랑에게 혼이 났다

바람은 보이지가 않으니

구경거리라고는 죄다 상처들 뿐이라고

꺾이다 부러지는 것들

부끄럽게 날라다니는 것들

오직 상처만이 전시가 되고

전시가 되면 팔려 나간다고

사진을 찍으려거든 개인 날 남은 것들을 찍자

가지 하나에 남은 열매가 세 개라도 그것들을 찍자

우는 얼굴 말고 밥술을 뜨는 손을 찍자

토하는 목젖말고 쩍 갈라진 자그마한 입술을 찍자

커다란 것들은 바로 그런 것들

세 개 남은 열매들이 팔릴 큰 그림은 못 되어도

큰 바람을 다 삼켜버린 뒷방의 쌓여가는 소심한 커다란 것들


상처를 입은 아이의 다큐를 찍던 남자는

아이가 그 날의 일을 오늘로 온전히 다 불러내지 못하자 화가 났다

이유를 얘기하고 강요를 하고 

대본을 써서 유도도 하고 해 보았지만

아이의 방어 또한 상당히 견고하여

남자는 언제나처럼 오늘도 별다른 소득없이 

난 너 대신할 화면이나 채우러 태풍이나 찍으러 가겠다

하고는 기분대로 막 일어 선 참이었다

뭔가는 찍어야만 한다

시간에 사람에 몰려 쫓기는 듯 해 자꾸 무릎을 잡고 숨을 고르는 버릇이 생겨 버린 남자는

아무도 없는 뒤를 향해 잠깐만이라며 손을 들어 부탁을 하고 하던 남자는

큰 바람이 분다며 몇일 째 떠들어 대던 뉴스를 다시 모아 읽으며 괜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바람이 아니라 온통 날리는 상처들 뿐이야

사랑에게 혼이 나서 뾰로퉁하게 차 안에서 빵이나 씹다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이 바람 찍을 만한 건지 아닌 건지 가늠하다가

그렇게 여전히 폭력적이지도 현명하지도 못한 채 밤을 다 보내버린 남자는

맑게 개인 아침 별 다르지 않게 살아남아 흐르는 한강 곁을 산책하다

나무 가지에 살아남은 작은 열매 사진을 찍었다

동작대교라는 표지판도

여전히 겁없는 비둘기의 사진도 찍었다

어쩌자는 거지

남자는 아이의 재판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몇일 째 아이를 찾지 않았다

아이가 법정으로 가는 길을 찍지도 배웅을 하지도

재판이 끝난 후 아이의 집으로 찾아가서 생생한 기분을 채집하지도 않았다

다음 날 아이가 왜 찍으러 오지 않았냐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냐고 찾아와 물었지만

남자는 딴청 피우듯 처음으로 그날 그 아이에게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점심 뭐 먹고 싶어? 너 뭐 좋아하니?

찍는 거에요?

아니야 찍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때 얘기해 볼게

우리 밥 먹자


W 레오

Kinga Cichewicz



2018.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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