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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오 Aug 31. 2018

그러니까 전화가 오지 않은 날

오늘 날씨 흐림

1
전화가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방의 방음은 꽤나 공을 들였나보다
소음이라도 들리면 전화가 올 테지만
나의 말에는 시끄러울 힘조차 담겨 있지가 않다
조용한 곳을 찾아
희미한 마음을 뜰 채로 떠 본다
가령 바닥
엄마가 나무로 만들어서
여름에도 시원하다고 한 바닥
더워진 공기가 위로 돌면
바닥은 다만 웅웅거릴 뿐
조용한 곳에 조용한 시간이 오면
나는 겨우 그 날 뱉은 마음들을 찾을 수 있다
바닥의 작은 부스러기들과 떨어진 머리 카락을 모아다가
그림을 그린다
시냅스를 연결하여
겨우 한 장의 슬라이드를 만들어 빛을 쪼인다

그것은 나인가
하지만 전화가 오지 않는다

(그것은 햇빛보다는 어둡고

마주선 이에게는 보이지가 않는 빛얼룩)

2
심심한 나를 당신이 와서 안는다
더 조용한 밤이 되어 나는 잠에 든다
아침이면 당신이 우리 조금 더 늙었다고 얘기를 해줄 테지
상냥하고 감사한 말

3
우리 이렇게 말했었지
우는 얼굴은 채 펴지도 못하고서
우리 이렇게 살자 그냥
우리 이렇게 말했었지
보는 것을 다 품지 말고
들리는 것을 다 믿지도 말고
우리 그냥 이렇게 살자 하고
하나 둘 세다가 잠이 들면
우리는 조금씩 집으로 다가가는 거야
기차 아주 오래 덜컹거리는 기차
걸을 필요도 없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서
눈을 감고 하나 둘 셋
우리 이렇게 말했었지
자리가 어디세요
창가가 제 자린데 그냥 당신이 앉으세요
나란히 앉게 된 우연이 다행이라면
오늘도 눈을 감자
어깨를 부끄러이 붙여가며
하나 둘 셋
먼저 잠든 나를 보며
너는 다행이다 했다 했다
네가 나라서 고개를 끄덕인 것을 알고 있어
나도 네 어깨 위에서 눈을 감은 거니까
잠이 들기 전까지
주문처럼 되뇌였지
우리 이렇게 살자 그냥
그냥 이렇게 우리 살자

4
그러니까
조그마한 사과는
더 배고픈 손 위로 떨어져야 한다
세상의 풍요로움은
나와 그가 다르다 하고
다른 것은
이리 보면 내가 밉고
저리 보면 그가 밉다는 것
그러니
이리 보이지 말고
저리 보이면 되는 일
저리 보이려면
저리로 가야 하는 일
그러니까
조그마한 말들은
조용한 가슴 위로 떨어져야 한다
나의 말들은
네 귓바퀴나 굴리는 것
소문은 소문의 궤도가 따로 있다네

5
그러니까
전화가 오지 않는 날
조용한 낙서 위에
낙서처럼 누운 나를
조용한 당신이 와서
침묵하게 안아 준 밤
감사하게 또 늙을 수 있음을
감사했다네
사랑한다네

W 레오
P Florian Pérennès


20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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