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 사는 동네는 와이프가 정했다. 첫째의 중학교 진학을 1~2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분당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여, 바쁜 내 대신 알아봐달라고 했다. 와이프 지인이, 분당치고 한적하고 학군도 나쁘지 않은 곳이라고 추천해 이사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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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온 첫날부터 멘붕이었다. 서울에서 퇴근 후 집에 오니 지상에도 지하에도 주차장에 아무런 주차공간이 없었다. 지금은 이중주차에 익숙해지고, 어디에 해도 문제가 없는지 감이 있지만 처음 며칠은 아파트 곳곳의 주차할 곳을 찾아 뺑뺑이를 몇바퀴는 돈 것 같다.
3.
물품 구입도 문제였다. 이사를 오기 전에는 아파트를 나가면 배스킨라빈스, 파리바게뜨 등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매장이 줄지어 있었고, 대형마트와 백화점도 근거리에 있었다. 덤으로 카페거리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곳 아파트 단지 상가에는 작은 슈퍼마켓, 오래된 치킨집, 동네 카페 정도밖에 없었다. 아마 배민과 로켓배송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이사를 갔을 것 같다. 게다가 싱크대와 샤워수전에는 정수필터를 꼭 끼워야 한다. 가끔 벽이나 천정에서 물이 새는 경우도 있다. 오래된 아파트의 숙명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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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마을의 장점으로 보는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아파트 단지가 중앙공원과 산사이에 있어 눈이 잘 안녹는다. 덕분에 어릴 때 이후로 처음으로 자녀들과 눈사람도 만들어봤다. 그리고 산으로 이어지는 경사로는 자연눈썰매장이 되어주어 우리 라임이가 멀리 안가더라도 친구들과 눈썰매를 탈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의 애들이 있는 집에는 플라스틱 눈썰매가 하나씩 있다.
5.
여기로 이사를 오면서 현대 문물의 쾌적함과는 살짝 멀어지며 시골로 이사한 기분이었다. 분당 아이들이 왜 공부를 잘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마을버스를 타고 서현이라는 읍내로 나가기 전까지는 동네에서 한눈 팔 곳이 없기 때문일 거라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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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오지와도 같은 마을이 어제 뉴스에 한참 오르내렸다. 분당에서 3곳만 선정하는 아파트 재건축 선도지구에 선정이 된 것이다. 아파트 단지에 KBS가 와서 인터뷰까지 하고 갔다고 한다. 코칭 업무로 정신없던 와중에 이곳에 내가 산다는 걸 아는 지인들에게 축하 카톡을 받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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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을 가장 먼저하게 되는 선도지구 지정과 관련한 성남시의 공지가 난 후 단지에서는 전체 입주민을 대상으로 한 카톡방이 열렸다. 주민 동의율, 소규모 주택결합 등의 배점으로 선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선도지구 선정준비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설립되고 멤버를 모집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응원하기 위한 지원금도 십시일반 모였다. 여기 준비위원들은 왜 선도지구가 되어야 하는지, 진행상황과 최종 지원이 마무리될 때까지 핵심적인 의사결정 등을 주민들에게 꼼꼼이 공유했다. 그리고 마지막 변수가 될 수도 있는 주민동의서의 사인 등도 밤늦게까지 하나하나 검수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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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지구 발표 시간... 분당에서 선정된 3곳의 마을 이름 중에 우리 마을이 맨 위에 올라와 있었다. 기자나 전문가들이 예측에 전혀 없던 마을 이름이었다. 아마도 분당의 모든 마을이 열심히 노력을 했을 것이다. 다른 곳의 준비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못했지만 회사의 사업전략과 업무체계를 코칭을 하는 내가 보았을 때 우리 마을의 준비위원들은 정말 성실함을 넘어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며 한마음으로 지원한 마을 주민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바쁜 일정에 카톡방을 눈팅만 하던 나는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9.
재건축이 완료되려면 많은 절차와 기간이 남아있기에 샴페인을 터뜨리는 건 이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과 예측 밖에 있던 마을이 선정이 되는 결과를 만든 추진위와 마을 주민들에게는 정말로 감사하고 축하할 일이다.
10.
나는 이번 과정을 지켜보면서 환경에 대해 불평하기 보다는 그 환경을 활용하고 즐길 줄 아는 마인드와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불편함의 에너지를 개선의 기회가 있을 때 성실함과 치밀한 노력이라는 에너지로 전환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환경이라는 상황을 제약으로 보는가? 기회로 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