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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선 Nov 19. 2020

자화상

마주본다
칼날을 토해낸다
비창 서린 조각 베이고 찢긴 단어들은
무언의 낯선 광경을 자아낸다
걸어본다
핏물이 솟구친다
쏟아지는 핏물만큼이나 폭발하는 그것은
마침내 폭풍우 되어 들이친다
발끝으로부터 손끝으로 머리끝도 붉다
투쟁의 세대 철철 쏟아낸 검붉은 체액
차오르다 들숨까지 삼켜버릴 형체

마주본다
핏물에 잠긴 얼굴이 있다
돌아본다
백지장 같은 얼굴이 있다
칼날을 내리친다
낯익은 얼굴들이 떠다닌다





그런 날이 있다. 이유 모를 불안과 고독이 온몸을 집어삼키우는 것만 같은, 그런 날이 있다. 실존하지 않는, 무형의 것으로서 다만 보내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이 며칠이고 반복되는 날이면 어떤 생각도 말도 소용이 없어지곤 한다.


사무실에 앉아 흐르는 빛을 본다. 창가에 드리운 것으로부터 백색의 형광등으로 시선이 이어진다. 순간의 빛은 칼날로 비친다. 온몸을, 생각을 헤집어 버린다. 모든 존재는 차마 없어지지 못해,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해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 투쟁한다. 발끝으로부터 지릿한 전기와, 타고 흐르는 생각과 감정들이 핏물 되어 솟구친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하고 수많은 인격을 마주하고 익숙하다가도 차마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 있고 마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손을 내리쳐 파열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핏물에 잠긴 얼굴도 창백한 얼굴도 나이고 거리에 부유하는 수많은 얼굴들도 나라 한다.


지난날의 감정. 문득 잠기우는 것. 문득 바라보는 것. 이전의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어쩌면 불안과 고독만이 이 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의 기록. 차마, 나약한 존재이니. 그럼에도 언제고 다시, 모든 것이 괜찮다는 것을 알고, 다시 웃음을 짓고, 또다시 평온과 사랑을 품어가는. 그리고 언젠가는 부디, 희망하고 소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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