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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문집

버번위스키

by 이경선

1천 미리 용량의 위스키 한 병을 손에 들었다. 지난밤이 그랬듯 일상의 마감엔 언제나 술잔이 있고 그런 날들을 함께하기에 충분한 용량이라 생각했다. 손아귀에 꽉 차는 버번위스키에는 45%라는 숫자가 적혀있었고 높은 도수와 함께 적갈색 액체가 풍겨낼 향을 상상했다. 달콤하고도 담백하거나 혹은 쓰디쓴 것이겠다. “괜찮으셨나 봐요, 오늘은 1천 미리를 가져가시나요?” 곧잘 얼굴이 익은 주인분의 물음이었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곤 길을 나섰다. 약간의 설렘과 조금의 텁텁함을 안은 채 집으로 향했다.


취할 때면 세상은 다른 색을 띠었다. 위스키처럼 적갈색이 되기도 하고 완연한 검정이 되기도 했다. 언젠가는 파랑과 노랑 그리고 빨강의 색이 되기도 했다. 세상이 휘어지고 발끝은 어지럽고 두 눈은 뽑힐 것만 같이 아려오기도 했다. 막상 세상은 참혹히도 정적이었고 두 눈은 그토록 선명했으나 보이는 건 그뿐이었다. 그런 밤 곧잘 글을 쓰곤 했는데 다음날 읽어본 글은 지독히도 난잡했다. 극단으로 치닫는 일이 잦았고 온통 슬픔과 절규로 적나라하기도 했다. 적은 글을 폐기하는 일이 잦았다. 위스키는 몸속의 절망만을 끌어내고 있었다. 어느 밤엔가 위스키를 멀리 치워두었다.


이따금 위스키가 생각날 때면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까만 하늘 선명히도 빛나는 달과 별을 보았다. 창문 너머 오가는 바람결을 느꼈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다 가끔은 글을 적기도 했다. 그럴 때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찰나의 허무와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위스키로는 채워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여 위스키를 지워내는 일들이었다. 어느 밤엔가 위스키를 따라내었다. 검은 하수구 아래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지난밤 마른 이불의 촉감이 좋아 이불을 턱밑까지 덮어내었다. 그리곤 가만히 앉아 밤하늘을 세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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