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이 한국에 기생관광 붐 시절

1971년과 1972년

by 함문평

작가가 고등학생 시절, 국어선생님 중에 특이한 분이 있었다. 지급 서부전선 장단면은 6.25 이전은 북한 땅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이후 우리 땅이 된 곳이다. 거기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했다. 교사 강습소에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워 학생들에게 풍금을 켜면서 가르치다 1.4 후퇴에 남으로 왔다. 휴전 후에 초등학교 교사를 하려고 했으나 졸업증명서나 북에서 하던 교사 경력증명을 할 수가 없어 일용직을 하면서 돈을 모아 야간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몇 번의 도전으로 우리 학교 교사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재수, 삼수로 겨우 82학번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1979년 12.12군사반란에 장손이 서울역에서 흑석동까지 걸어오는 수난만 없었으면 재수삼수 갈 일이 없었다고 4수 대비 한우를 4마리 팔아 통장을 주셨다. 그 돈으로 대학 등록금 내고, 한 학기 생활비를 했다. 그 후 대학 졸업까지 매년 4마리 팔아 학비와 생활비를 했다. 할아버지는 가끔 학교에 오셔서 장손이 수업 듣는 것을 복도 밖에서 보셨는데, 처음은 교수님이 혹시 안기부 끄나풀 망원을 노인으로 교체했나 의심했다. 복도서 만난 교수에게 국어교유과 1학년 74번 함문평 할아버지라고 신분을 밝혔다. 가, 나, 다 순으로 길채란이 1번 함 씨가 74번 황 씨가 75번인 것을 78명이 성적순으로 장손이 74등이냐고? 물으시길래 아닙니다. 우리 조상이 가 씨면 1번인데, 가 씨는 없고 길채란이 1번이고 가나다 순으로 함 씨가 74번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안심하셨다.

대학졸업하는데 필요한 전공필수, 교양필수, 전공일반 선택 최소학점만 이수하고 국민윤리교육과에서 사회사를 신청했다. 그 시간 교재 일부다. 박종성 <매춘의 정치사회학>이었다. 1972년은 1971년에 비해 관광객 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났다. 그해 일본이 중국과 외교를 정상화하면서 대만과 외교단절을 했다. 당시 대만은 일본인들의 주요 섹스 관광지였는데, 대만과의 단절로 섹스 관광지가 한국으로 바뀐 것이다.(동맹 속의 섹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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