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부통령
할아버지는 30년 전인 1995년 12월 12일에 돌아가셨다. 당시 작가는 정보사령부에서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 발표가 났기에 부대원들과 진급 축하 회식 중에 연락을 받았다. 하필 크산티페는 임신 마지막 달이라 언제 태어날지 모르는 강릉 함 씨 후손 출생에 온 신경이 쓰인 상태였다. 12월 14일에 할아버지를 선산에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12월 15일 새벽에 아들이 태어났다.
중고등학생시절 중간고사, 기말고사 공부를 우리 집에서 함께한 친구들을 시험 마지막 과목이 끝나는 날 우리 집으로 모이게 했다.
교육적으로는 학생에게 술을 먹이는 것이 잘못이지만 스트레스 엄청 받은 시험이 끝나면 대부분 학생은 만족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탕수육에 짜장면 곱빼기, 고량주를 시켜서 학생들은 딱 2잔만 마시게 하고, 나머지는 장손과 장손 친구들에게 돌아가면서 한잔씩 따르게 했다.
학생이니 일단 공부 잘하고 시험 점수 잘 받는 것이 중하다. 그러나 행복은 말이야 학생시절 성적순도 논산훈련소 군번순도 아니라고 하셨다. 내 나라 역사를 전공이 의사 거나 판검사 거나 건설현장 막노동자라도 알아야 한다고 일본강점기 시절 의병 이야기, 이승만 독재 시절 부산 정치파동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검정교복 깍까머리 중학생은 고량주 두 잔에 알딸 달한 상태서 할아버지 말씀을 경청했다.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요지는 이승만 친위 쿠데타에 맞서 김성수 부통령이 항의표시 사표를 제출했고, 이종찬 참모총장은 전장병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지휘서신을 보냈다. 1952년에는 정신 똑바로 박힌 국무위원과 장군이 있었지만 2024년 12월 3일은 국무위원이나 장군이나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은 없고, 오직 맹목적인 추종자만 있었다. 이날 나라를 살린 것은 계엄해제결의안 통과시킨 국회의원과 시민과 대령 이하 이병까지다.
김성수 부통령 사임의 변 일부다. 나 김성수 부통령은 대통령이 사직을 파괴하려는 반역행동을 차마 예상하지 못했소이다. 부산에서 이번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뮈라 소위 국제공산당과 연관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일하며 체포할 수 없는 국회의원 50여 명을 체포 감금하는 야만의 짓거리를 했소이다. (중간생략)
이에 항의하면서 부통령직 사임 청원서를 제출하는 바입니다.
74년 후에 읽어도 가슴 찡한 충언 아닙니까? 세상에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도 국무위원 수준은 74년 전이 더 멋있습니다. 만약 한덕수가 김성수 반만 따라갔으면 역사에 두고두고 칭송받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