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재발견
할아버지는 역사책에 언급이 없다. 하지만 역사책에 나오는 친일파보다 할아버지 손자인 것이 자랑스럽다.
할아버지는 직업으로 존경받을 수 없는 아편장사로 돈을 벌어 김 구 선생과 김일성에게 일본놈 때려잡는 무기구입하는 돈을 보냈다. 할아버지 말씀이 내가 독립운동은 못했으나 독립군 무기구입비 일조했다고 말씀하셨다.
대방동 중학생 시절과 흑석동 고등학생 시절에는 할아버지와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나이 65세가 되니 조카나 <백서>, <777>을 들고 사인받으러 온 독자에게 써주는 말이 <행복은 성적순도 군번순도 아니더이다>를 써주지만 대방동, 흑석동 시절은 할아버지 말씀 들을 기회도 없었고,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하려고 하면 할머니가 우암 송시열 후손이라는 것을 무기로 손자 서울대갈 길 방해하지 마라고 할아버지 언로를 봉쇄했다.
재수, 삼수 시절에 할아버지 말씀을 많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안테나가 높았다. 1979년 12.12군사반란도 3일 후에 전모를 말해주셨다. 지금도 알 수 없는 할아버지 정보력이었다. 언론통제 더구나 계엄하의 일이라 뉴스는 계엄사에서 내보내라는 것만 보도되던 시대에 12.12군사반란 주동자는 하나회이고, 보안사 군통신감청이 반란군이 승리했고, 윤성민 참모차장 놈과 노재현 국방장관은 총살시킬 놈이라고 하셨다. 특히 노재현은 조선시대 계유정난으로 치면 병조판서 김종서 역인데 김종서 발톱에 때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손자는 할 얘비 말을 글로 남기는데, 내가 죽고 30년 후에 쓰라고 하셨다.
<백서>에 들어있는 기미정란이 할아버지 어록을 쓴 글이다.
할아버지 말씀이 청와대를 왜놈 <료칸>으로 개조할 연놈이 당신 사후 30년에 나타날 거라고 하셨다. 그때는 별말씀 다 하시네? 했다.
청와대가 아니고 한남동으로 위치만 다를 뿐 다디미방에 일본식 편백나무탕까지 소름이 돋았다. 할아버지의 재발견이다.
장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