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뎐. 74
할아버지는 작가가 농담 삼아 조선의 마지막 선비, 마지막 한문서당 훈장이라고 소개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손 위장전학을 위해 전학 시기는 어머니, 아버지, 아들이 세대로 되었지가 전학 확정 후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의 세대 구성했다. 그러니 내막을 다 아는 대방초등학교 동기는 그러려니 넘어가고 중학교서 처음 만난 친구는 놀러 와서 너는 아빠, 엄마 없어? 물었다. 그때마다 사실은 아버지 예비군 훈련이 아직 남아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나를 주민등록상 묶고, 아버지 일하는 곳에서 동원은 끝났고, 소집이 남았는데, 그것도 참석하려면 키우는 소 10마리, 개 12마리, 닭 100마리 사료주기 쉬은 일 아니고 대신 사람 쓰면 일당 나가서 그렇게 한 거야라고 했다.
지금도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회 가면 나의 할아버지가 지팡이 짚고 수업 중이거나 말거나 앞문 열고 선생냄께 90도 폴더 인사 서천시장서 한동훈이 윤석열에게 한 수준의 인사가 화제다.
함문평이 이 늙은이 장손입니다. 늦잠으로 아침도 못 먹고 와서 도시락 2개를 싸왔다고 하시면서 전해주셨다.
그때 나는 부끄러웠다. 세월이 지나 동창회 나가면 동기들이 그런 할아버지 있는 네가 부러웠다고 한다. 사실 할아버지는 서당서 한문만 배우고, 서당서 학동만 가르친 분이지만 금 두꺼비 뇌물로 주고 국가교육원원장 지낸 이배용과는 급이 다르다. 돌아가신 김 구 선생과 나쁜 인간이지만 김일성 양쪽으로부터 가경 선생 칭호를 들었던 부나이다. 왜냐하면 만주에 쉬 아편 팔아 번 돈의 큰 금액을 군자금으로 균등하게 보냈다. 그러니 김일성도 김 구 선생도 할아버지를 존대했다.
할아버지가 장손이 고3까지는 막걸리 심부름은 시켜도 대작은 없었는데, 고교졸업식날 검정교복을 찢어버리고 밀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이후는 심부름 후 함께 마셨다.
재수, 삼수 기간 막걸리 대작에 조손 수업이 보통학교 4년 수업보다 진지했다. 작가가 권력의 힘으로 압박 회유 또는 돈의 유혹에도 독야청청이거나 까마귀 동네 백로 유지는 할아버지 가르침과 6년 학교시절 교훈이 의에 살고 의에 죽자. 참에 살고 의에 죽자 덕분이다.
금 두꺼비를 뇌물로 주고, 국가교육위원장이 교육을 좌지우지해봐라 나라꼴이 무엇이겠는가를?
할아버지는 장손이 고교를 졸업하자 손을 잡으시면서 장손 자랑스러운 나의 장손이라고 하셨다. 이제 대학은 명문대 갈 수도 지방 허름한 대학을 갈 수도 있으냬 이미 장손은 교훈이 의에 살고 의에 죽자로 3년, 참에 살고 의에 죽자로 3년 공부했다. 나머지 인생 어떻게 살 거야? 돌발 질문에 뭐 간단하네요, 중고등학교 교집합 <의>로 살겠습니다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술을 따라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