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추억. 70
서울 대방동 성남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시절 연합고사를 보고 서울시 인문계 고등학교 합격점수에 들면 추첨으로 학교 배정을 했다. 요즘은 경기고, 서울고가 모두 이전했는데, 그 시절은 공동학군이라고 4대 문 안 학교를 추첨으로 서울시에서 어느 한구가 아닌 골고루에서 뽑았다.
공동학군이 안되면 차선책으로 성남고등학교에 배정받기를 바라지만 뜻대로 안 되어 정기석, 박해익, 성성모, 김명훈, 그리고 이름도 기억 안나는 치구가 흑석동 중대부고에 배정받았다.
이름도 기억 안나는 친구는 5월쯤 중대부고를 자퇴했다. 이유는 학교가 너무 질서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성남중학교는 학교에 감나무가 있었는데, 감이 익어 땅에 떨어져도 중학, 고교 학생들이 따 가는 사람 한 명도 없었다. 감을 따다 걸리면 정학이었다.
중학 동기 박해익은 8년 동안 중대부고 총동문회 사무총장을 했다.
정말 그가 사무총장 기간이 회장은 바뀌더라도 사무총장은 해익이가 해야 된다는 서청원 국회의원 한마디에 계속연임했다.
그러다 회장 기수가 79 다음 80차례가 되어 해익이 총 동회 장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나 앞 회장들은 모두 기업회장, 대표이사, 한방병원 원장인데 해익은 명함이 미치지 못했다.
총 동회장 꿈을 접고 안양공설운동장 야간 경비를 하다 고인이 되었다.
성남중 졸업하고 뺑뺑이로 중대부고 간 정기석이 고인이 되었다.
기석이는 중학교 모임은 많이 참석 못했지만 부고 80 총무는 7년 동안 했다.
더 이상 할 수 없으니 이유 불문하고 맡으라고 해서 일산에서 스투디오하는 동기가 총무를 인수받았다.
나에게 하라는 것을 성남중 25 총무라 혹시 경조사가 겹치면 처신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기석이가 부고 총무를 넘기고 개인적으로 내가 조언을 얻기 위해 안양에서 만났다. 그때 총무를 더 할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 췌장암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가족에게도 말을 못 했다고 했다. 아내와 아들, 딸 충격을 덜 주기 위해 말할 찬스를 본다고 했다.
영구가 보내는 문자, 밴드에 올리는 모임 안 나오는 사람이 읽으면 묘한 감정, 반박도 못하고 참석 못한 것에 미련이 남는 작가 특유의 쓰리쿠션도 안다고 했다.
알면서도 나는 의사가 환자에게 알려주면 이미 말기라 길어봐야 1년 1년 반이면 고인이 된다는 것이 내과의사 은밀한 통계라고 했다. 야, 그래도 중학교 교훈이 의에 살고 의에 죽자고, 니기미 우리는 성남고 그대로 올라가기를 바랐지만 멀리 흑석동까지 왔는데, 어라 건학이념이 참에 살고 의에 죽자인데 옳을 의를 6년간 보고 지낸 사나이답게 나 췌장암이다.
어쩔래?
모임 못 나가는 거 인정해 다오.
아내, 아들, 조카 다 말해, 나 췌장암인데, 건들지 마! 먹고 싶은 대로 먹고살다 간다 선포하라고 했다.
물론 기석이가 주변에 선포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른다. 췌장암을 의사로부터 듣고 6년 이상 버틴 기석이의 의지력에 찬탄한다.
어차피 아픈 몸이라 12월 5일 송년회를 사당동 옥된장에서 한다 알고나 있으라고 안부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는데 안 받았다. 나도 성격이 급해 신호 5번 가는데 안 받으면 끊는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기석이었다.
기석이니?
아닙니다. 아들입니다. 아버님이 조금 전에 돌아가셨어요 했다. 멍 했다. 기석이 아들도 나도 다음 대화를 못했다. 모바일 부고장 만들어지면 보내겠습니다. 그래. 하고 전화를 마쳤다. 하루만 먼저 전화했더라면 기석이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늘 나는 허탕인생이었다.
그곳에서 편히 쉬기를 바란다. 기석이 편히 쉬어라. 영구고 개명해서 문평이란 걸 알리지도 못해 미안하구나. 이글 읽는 분은 다리에 걸을 힘 될 때 중학동기 모임 특히 송년회 잘 참석 바랍니다. 가장 인기 있는 모임이 고교동창회, 동문회 다음이 초등 동기화 동문회, 그다음이 대학 과모임, 총동모임, 가장 인기 없는 것이 중학동기회 중학 총동문회임을 알지만 작가가 중학동기회 총무를 8년 차 하고 후임 없으면 계속하려고 하는 것은 <백서>, <777>이 잘 팔려 인세 엄청나게 들얘오면 중학동창생과 부산항 출발하여 일본 돌아오는 크루즈여행하고 싶어서입니다. 가장 인기 없는 곳이라 저의 돈이 가장 작게 들고 널리 소문이 날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