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이 광주교도소를 접수한다면 사전에 전통이 가서 급식이나 경계 등에 대한 협조가 있어야 하는데 5.18 시기에 계엄군이 광주교도소를 점령한 것은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해서 죄수들을 해방하고 죄수들이 나와서 천방지축 날뛸 것을 막기 위해 점령한 것이 아니었다.
광주시민의 민주항쟁 사실이 외부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노루목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5월 24일 광주교도소에 주둔한 11 공수부대가 비무장인 광주보안부대와 경찰로 이루어진 수사팀에게 교도소를 인계하고 광주비행장으로 철수했다.
장갑차를 선두로 보무도 당당하게 간선 도로를 따라 전진했다.
철수하는 도중 광주 송암동 개방대학 뒷산에 잠복하고 있던 굉주보병학교 교도대원과 공수부대가 서로 오인을 해서 교전이 붙었다.
당연히 최정예부대라고 자부하던 공수부대가 잠복 교도대에게 초전박살이 났다.
90미리 무반동총으로 장갑차를 박살 내는 실력이 일반 급조된 시민군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했다.
무반동총을 제압 안 하면 공수부대 피해가 늘어날 것을 염두에 둔 지휘관이 저격병에게 무반동총 사수들을 조준 사격을 해서 사살했다.
싸움을 중지시키고 상부에 부대배치 확인과 보병학교와 특전사 부대만 다르지 모두 계엄사령관 지휘통제 하에 있다고 생각해 큰 교전으로 번지지 않고 끝났다.
이것만 보더라도 광주에서의 특전사와 광주 31사단이나 전투 병과학교 교도대의 지휘체계가 다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니 광주청문회에서 지휘계통이 일원화되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군사학을 조금만 공부한 중. 소위만 있어도 지휘계통이 하나면 오인사격이 발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80년 특전사와 31사단의 작전통제를 받았던 전투교 교도대와의 오인 사격은 더 있다.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광주사태 시 아군끼리의 교전을 사실대로 기록 안 하고 시민 폭도에 의한 사망이라고 국립묘지에 안장시킨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재우 대령 후임 박동준 대령이 이 사건을 신속히 파악해 서울 보안사령부로 긴급으로 보고했다.
하지만 서울 보안사 지휘부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여순반란 사건처럼 될까 봐 허화평, 이학봉 모두 전화통을 들고 광주보안부대를 호출했다.
오인사격에 개죽음당한 특전부대원은 공적조서에 폭도들의 총격에 순직한 것으로 공적조서를 꾸미고 사후 일계급 특진을 했다.
신속한 상황 보고 고맙다고 이학봉 대령이 광주보안부대원에게 거금의 수사격려금을 주고 상경했다.
한편 20사단 62 연대가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여 3 공수여단과 교대했다.
61 연대는 주남마을로 이동하여 7.11여 단과 임무교대를 했다. 주남마을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 공수여단 선두가 효덕초등학교 삼거리 부근에서 트럭에 탑승한 무장 시위대를 발견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이외에도 5.18 시기에 공수부대와 20사단 간에 상호 사전 협조 없어 교전을 했고 사망자는 폭도들에 의한 사망으로 공적조서를 꾸몄다.
앞 글에서 무공훈장을 받았다가 삭탈된 이야기도 있지만 전쟁에 나가 싸우다 전사했으면 자식이 죽어도 부모님이 그래 국가를 지키다 죽었다고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적과 싸운 것도 아니고 국군이 한쪽은 특전사이고 한쪽은 광주 지역부대원 또는 보병 20사단 소속이 다르다고 서로 총질을 하게 만든 자는 처벌이 없고 사망자는 솔직하게 아군끼리 오인 교전 사망이라고 묘비에 기록해야지 죄 없는 광주시민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면 그 후손들은 다 거짓말을 진실로 알 것 아니겠는가?
43년이 흘렀지만 더 세월이 흘러 굳혀지기 전에 광주사태라고 언론통제로 보도한 것 중에 거짓뉴스는 바로잡아 역사에 기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