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학교에서 체험활동과 인성교육에 관심이 있지만 1970년대는 초등학교에서 국민교육 헌 장을 암송했다. 그런 시절에 영수는 오늘날 표현으로 인성교육 체험교육을 경험했다. 춘천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첫 교사발령을 각림초등학교로 오신 남궁상만 선생은 교실에 수업시간표가 있지만 시간표는 시간표고 선생님 마음대로 수업을 했다.
산수 시간에 소나기가 내리면 남녀불문 학생과 선생이 비를 흠뻑 맞으면서 축구를 했다. 수중전은 국가대표도 힘들어하는데 초등학교 4학년이 수중축구를 했으니 얼마나 체력소모가 많고 힘들었겠는가?
그렇게 힘들게 축구를 하고 녹초가 된 학생들을 도시락도 먹기 전에 바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학교에 샤워시설이 있었으면 샤워를 하는데 시설이 없어 조기에 집으로 보내니 반드시 집에서 물을 데워 목욕을 하고 자라고 했다.
요즘 ㄱ렇게 수중축구를 하면 학부모들이 당장 학교로 달려오겠지만 그때는 어느 학부모도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일찍 보내 교과 진도가 떨어지는 것은 보충수업을 하거나 쉬운 단원을 빨리 지나가는 방법으로 인접 월현초등학교, 부곡초등학교, 가천초등학교, 안흥초등학교 등과 모의평가 시험에 항상 전체 평균 점수가 높아서 횡성군 교육청에서 혹시 부정 시험을 의심해 감독관이 내려왔다. 감독관 입회하에 치른 시험은 의심받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학생들이 더욱 분발해 전 과목 평균이 횡성군 전체 4학년 보다 평균 3점이 높게 나왔다. 이 기록은 횡성군 교육청이 통겨를 유지한 60년 역사에 아직도 깨지지 않은 전설적 이야기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다가 눈이 내리면 운동장에 나가 눈싸움을 했다.
눈이 내리다 멈추면 눈사람을 만들었다.
흰 눈이 내리면 영수와 할아버지는 올무를 만들었 다.
영수가 10번 반생이를 1미터가 조금 넘는 길이로 똑같은 길이로 니퍼로 자르면 할아버지는 올무를 만들었다.
행정명이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각림촌은 해방 직후 할아버지가 각림서당을 운영했던 곳이나 문하생이 줄어 1979년 서당문을 닫았다.
강림이 한자로 외울 강에 수풀림으로 쓰고 있지만 신라시대에 이곳에 깨달을 각에 수풀림 절사자를 쓰는 <각림사>가 있었다.
조선시대는 원주 강원감영에서 직접 관리하는 양곡 창고와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는 영월군 수주면 각림촌이라 불리던 곳인데 1917년 토지조사사업에 이곳 조사를 마친 일본인 말단 공무원이 도저히 각이라고 발음이 어려워 거꾸로 할까 강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강림으로 한 것이다.
곧 광복 80주년이 되는데 강림으로 부르는 것에 전영수는불만이 많았다.
각림 뒷산은 토끼가 많이 살았다.
올무를 20여 개 만들어 할아버지와 영수는 토끼똥이 있는 길목에 매설을 했다.
하얀 눈이 쌓인 눈길을 헤치고 올무를 회수하면 올무에 걸린 토끼 서너 마리를 회수했다.
할아버지는 토끼 가죽을 벗겨 그늘에 잘 말려서 손자, 손녀들의 귀마개를 해주셨다.
어떤 놈은 눈을 감고 어떤 놈은 눈을 감지 않은 것도 있었다. 가장 슬픈 눈이 올무에 걸린 토끼 눈이었다.
영수가 안덕영을 찾아간 것은 영업을 위해서였다.
상조 한 계좌 5만 원을 가입시키면 다음 달에 10만 원의 수당이 떨어지기에 한 달에 15 계좌만 가입하면 되겠지 생각하고 상조모집인에 뛰어들었다.
첫 달은 그럭저럭 아는 사람을 통해 목표 달성을 했으나 다음 달부터는 갈 곳이 없었다. 궁리 끝에 헌책방에서 동기회 인명록을 3만 원에 구입했다.
소대장 시절 동기부터 찾았다.
동기회 주소록 전화번호와 그대로인 동기도 있었고 변경된 번호도 있었는데 안덕영은 그대로였다.
010-3145-739X 조심스레 눌렀다.
예. 안덕영입니다.
나. 전영수다. 22사단에 근무했는데 기억하겠니?
그럼. 기억하지? 얼마만이야?
30년이 넘었지?
반갑다. 그런데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음, 박해익 총무에게 문의했지?
반갑다.
지하철 충무로 7번 출구로 나와 똑바로 올라오면 편의점 하나 있고 그 골목 지나서 5층 건물인데 1층은 핸드폰 가게이고 2층은 출판사, 3층은 광고회사, 4층이 에이마이너스 4 여행사야.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했다.
여행사라고 하지만 1인 사업이라 5평 남짓한 사무실에 일본 전도가 걸려있고 교토이도, 전철노선도, 기차노선도, 고속버스 노선도가 벽에 붙어있고 컴퓨터 데스크톱 2대, 노트북 2대가 전부였다.
처음부터 상조 이야기를 꺼낼 수 없어 중위 시절부터 현재까지 서로 인생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이야기 중에 안덕영이 한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한 이야기를 들었다.
덕영이 일본 스꾸바 대학교 응용미술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미족장학금을 받았다.
백운택, 정호영, 윤종필, 김병욱 등이 공모하여 안덕영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신고하고 진술서를 써서 간첩으로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열쇠전망대에서 사진촬영한 것을 윤종필이 안덕영이 촬영한 것을 기무부대에 제출했다.
그들이 제출한 진술서와 사진 몇 장 무심천대학교 응용미술과 학생들 졸업여행단에 끼어 일본 여행하면서 백운택 소령과 대화한 것이 모두 녹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