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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선경후사>

by 함문평

학생이 되어 처음 글짓기를 한 것은 중 1 국어 시간이었다. 전교조 선생들과 추종 학생들은 설립자 김석원 장군을 친일파라고 동상을 파 없앴지만 우리 학창 시절은 동상 앞 수업이 추억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재수 시인이 국어를 담당하셨다. 교실 창밖에 목련이 하얗게 속살을 수줍은 처녀 봉오리처럼 터져 나올 때 봄비가 내렸다.


출석을 부른 후 모두 우산을 쓰고 교과서는 들지 말고 동상 앞에 집합~~


우리는 <교과서 들지 말고>에 필이 꽂혀 우당탕탕 뛰어갔다. 나와 선생님만 교실 건물 배치대로 ㄱ자 길을 걸었지 다들 운동장을 일직선으로 가로질렀다.


우산을 쓰고 동상 올라가는 계단에 번호순으로 앞번호는 앞줄에 20번대와 30번대는 가운데에 50번 이후는 뒷줄에 섰다.


오늘 수업은 꼭 줄을 안 서도 된다. 지금부터 각자 비를 맞는 봄의 땅과 꽃과 풀이 어떻게 비를 맞나 구경을 하다가 종소리가 울리면 교실로 들어가는 것이 오늘 수업이다.


오늘 수업은 절반의 수업이다. 원래 나의 생각은 여러분 우산 없이 비를 홀딱 맞고 소감문을 시나 산문으로 쓰게 하는 것인데 다음 수업도 있고 여러분 감기 걸리면 선생님이 교사 해직될 것이 겁나 우산을 쓰게 한 것이다.


시는 원고지 2-3매로 산문은 길면 채점 힘드니 10매 이내로 쓰라고 했다.


집에 와서 원고지 10장을 앞에 두고 제목 <봄비> 1320 함문평을 쓰고 멍하니 원고지만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복덕방서 돌아오셔서 뭐 하느냐? 물으시길래 봄비 오늘 비 구경하고 글을 써오라는데 쓰려니 원고지가 만주벌판으로 보여요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글이라 문리가 트여야 쓰지 그냥은 안 써진다고 하시면서 우산을 쓰고 동네 한 바퀴 더 돌면서 봄비가 손자라면 하늘에서 내려와 먼저 어디에 착지해서 이디를 경유 한강으로 가서 서해로 흐르고 또다시 구름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는지 생각하고 글을 쓰라고 하셨다.


정말 신기했다. 원고지 10장 아니라 30매를 뜯지 않고 그대로 쓸 생각이 넘치는 것을 참고 10매를 써서 할아버지께 보여드렸다.


보시고는 잘 썼는데 봄비 오는 이야기만 있지 손자의 생각, 손자의 심정이 없다고 하시면서 지금 10장 중에 줄일 거 줄이고 뒷부분 3장은 나의 생각 나의 심정을 담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수정한 글을 선생님은 반마다 다니면서 낭독했다.


할아버지가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어 <선경후사>라는 국어 완전정복에 나오는 단어를 안 쓰셨지만 전재수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하신 선경후사를 할아버지에게 글쓰기기 지도를 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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