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평야담

by 함문평

文平野談 六

합천두광과 박경석 좌관은 소화 39년 서기로 1964년에 진해육군대학 정규과정 학생군관이었다.


요즘은 육군대학이 계룡대에 최신식 건물에 도시가스 난방이지만 그 시절 육 대 아파트는 연탄을 갈아 넣어야 했다.


지금은 부대에 육군대학 가야 할 군관이 있으면 먼저 그 자리에 군관을 보직해 주고 육 대를 보내지만 소화시기는 군관이 원천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전방 주요 사단은 좌관급 군관을 최대한 육 대 입교를 미루다 보니 박경석은 중좌가 되어 육 대 입교를 했다.


군사칭호도 중좌였기에 학생장교 중 우두머리 대표 군관을 박경석이 맡았다.

군사칭호는 박경석이 높지만 나이는 합천두광이 두 살 위였다. 학습기간이 1년이었다.


공부하는 내내 합천두광과 박경석이 사사건건 충돌했으나 박경석이 늘 두광을 압도했다.


학습이 거의 끝나갈 무렵 실시하는 함안 야외종합훈련장에서 실습을 마치고 백두산 대령이 교수부장으로 학생대표 만찬에 박경석과 합천두광을 부른 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표는 박경석이니 한 명만 부를 것인데 다카키마사오 총독이 합천두광을 양아들 수준으로 사랑한다는 소문에 합천두광을 잘 대접하면 백두산 대령이 장군 진급에 도움이 될까 하는 요즘 공영방송 앵커가 명품 백을 파우치라고 알아서 기는 심리였다.


요즘 방첩사령부 전신이 안보지원사령부 그전에 기무사령부 그전에 보안사라고 이름만 변경했지 하는 일은 그대로였다.


육군방첩부대장 박영석 장군을 윤필용 장군으로 교체한다는 라디오 뉴스가 나왔다.


박영석은 박경석의 형님이었다. 박경석은 흥분된 소리로 정치군인이 방첩대를 접수했다고 하자 합천두광 소좌가 박경석 중좌에게 대들었다.


백두산 교수부장이 겨우 말렸으나 앙금은 사라질 수없었다.


세윌이 지나 합천두광이 12.12군사반란과 광주 5.18을 진압하고 그 유공자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게 했다.


박경석은 준장으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이라 공적조서를 총괄해야 했다.


인사참모부장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훈장이라는 것은 적과 싸워 공훈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다. 아무리 광주의 대학생과 시민이 데모를 했기로 적은 아니다.


국민을 지키라는 군인이 국민에게 총질하고 훈장을 받는 것은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아온 내 인생에 흠이 된다. 전역할 테니 전역처리 해주고 공적심사는 후임자에게 하게 하라고 군문을 떠났다.


100여 명의 군사반란 유공자가 훈표창을 받았으나 세월이 흘러 여소야대 국회시절에 국회가 그때 훈장을 삭탈하는 법을 만들어 삭탈했다.


이 나라가 정의의 나라가 되려면 총독은 누가 되더라도 여의도 民議員들은 여소야대가 되어야 한다.


부디 오는 사월 令和六年 민의원은 與小野大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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