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군복

by 함문평

아버지는 군복을 세 번 입고 벗었다. 돈을 써서라도 군대를 면제받거나 보충역으로 가려고 애쓰는 나라에서 세 번이나 군복을 입었다면 정상이 아닐 것이다.

첫 군복은 징용으로 관동군 XX 사단 7396 부대였다. 일본은 나남에 19 사단 용산에 20 사단 사령부를 두고 20 사단은 조선을 방위하는 부대로 나남의 19 사단은 한반도 북부를 담당했다. 관동군에 복무하던 중 일본군 간부들끼리 수상한 은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었으나 당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내용을 중국군 포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중국군 포로의 말이 조선은 독립하게 되고 일본은 패망한다.


일본 천황이 연합국에 대하여 항복을 할 것이다ᆞ일본 놈들은 항복 후 안 다치고 일본으로 돌아갈 방도를 논의 중이라고 했다.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벌판 개발에 노력동원 된 것이다. 국가가 있고 국가가 있어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힘없는 국가의 일본군으로 참전 일본군 포로 중 한 명으로 취급되어 시베리아 개발에 동원되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 일행은 시베리아에서 조선으로 귀환을 했다. 소련화물선 블라디미르 호를 타고 1197 년 12 월에 흥남 항에 도착했다. 흥남여자고등학교에 임시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2 천여 명의 포로가 흥남여고 운동장에 임시 텐트와 교실에 분산 수용되고 포로 심사를 받았다. 고향이 북한의 평양, 신의주, 함흥, 혜산, 사리원 출신 사람들부터 신문을 받고 해당지역 가는 교통비를 수령해 먼저 출발했다.


남은 것은 남한 출실 900여 명이었다. 900 명이나 되는 인원을 북한이 다 고향까지 데려다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각자 고향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는 여비와 중간의 숙식비를 환산한 돈을 지급하고 38 선을 넘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1948년 2 월 4 일 38선 접경지역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벌판을 국군 복장이 아닌 청년들이 남하를 했다. 포로로 잡힌 조선인 포로가 시베리아 억류생활을 마치고 귀환했다.


개성 파주지역에서 잡힌 200여 명의 소련군 복장의 청년들은 파주경찰서에서 인천 용현동에 위치한 전재민 수용소에 이송되었다.


강원도 횡성에서 1925년 6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1930 년 4월 청일보통학교에 입학했다. 6 학년 때 할아버지가 보증을 서준 것이 문제가 되어 집안 형편이 기울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춘천에 있는 봉래상사에 취직해 심부름을 해주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 무렵 춘천에 춘천농업학교가 5 년제로 개교했다. 봉래상사 사장이 근면성과 정직함을 헤아려보고 춘천농업학교에 보내주었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 봉래상사일을 보라고 했다.


할아버지 보증 잘못으로 가세가 기울어 가자 집안 형제들도 귀찮게 여기는 상황에서 공부까지 시켜주는 사장이 아버지에게는 친척보다 고마운 분으로 여겼다.


춘천 농업학교 5 학년 졸업을 앞두고 징병제가 실시되자 징집되었다. 1943 년 4 월에 징집되어 길림성 관동군 육군훈련소에서 2 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입대할 때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수놓은 ‘센닌바리(千人針)’를 고모 함 봉순이 만들어 주었다. 헝겊 한 조각에 여성 천명이 한 올 씩 빨간 실로 수를 놓은 것이다. 말이 천명이지 어떻게 천명이 수를 놓았겠는가? 대부분 봉순 고모가 하고 횡성 속실 마을 고모가 아는 여자 몇 명 성의로 수를 한두 수 부탁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 천 한 조각을 그는 정말 부적처럼 믿고 몸에 늘 지니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관동군이 패망해도 포로가 되긴 했어도 죽지 않고 살았다. 늦었지만 귀국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살게 된 것이다.


내 인생 군대를 두 번 다녀오고, 의용군으로 근무한 것까지 치면 군복만 세벌이다. 칠십 인생은 군복에 다 실려 보냈다고 한탄했다.


1943 년 8월 1일 춘천에서 청일을 향해 목욕하고 부모님께 인사도 못하고 불효자는 징집되어 간다고 하직 인사를 하고 입영열차를 탔다. 무단장에 도착해서 다른 지역서 온 장정들과 광장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을 먹고 다시 징병 열차를 타고 간 곳이 하얼빈이었다. 하얼빈 중학교 강당에서 잠을 자고 운동장에서 밥을 먹었다.


1945년이 되자 일본은 급격히 불리하게 되었다. 미국이 B-29 폭격기로 일본 본토를 융단폭격을 하였다.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사상자 12 만여 명 이재민 100만 명이 발생하였다. 미 공군이 태평양 섬에서 발진한 폭격기가 동경을 처음 공습한 것은 1944 년 11월이었다. 마리아나 군도를 점령해 비행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중국의 청두(成都) 비행기지에서 이륙해 일본 본토를 공습했다.


왕복 비행거리를 감안하여 폭탄 무게를 가볍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리아나 군도에서 이륙을 하면 무장을 최대한으로 하고도 되돌아오는데 문제가 없었다.


학교 강당에서 잠을 자고 동이 트자마자 인솔 장교가 일행을 인솔하고 간 곳은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부대로 입대했다. 새벽 6시 기상나팔 소리에 기상을 하고 밤 10시 취침나팔 소리에 취침을 했다. 기상을 하면 연병장에 모두 모여 천황이 살고 있는 동경 방향으로 향해 머리를 숙이고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하고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제창했다. 구보를 하고 조식을 먹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조선 주둔 일본 부대를 ‘조선군’이라 부르고 만주 일대 주둔하는 부대를 ‘관동군’으로 불렀다. 조선군은 2 개 사단 외에 영흥만 요새 사령부, 진해만 요새 사령부, 조선 헌병대 등이 있었다. 용산 주둔 20 사단은 조선남부를 담당했고, 나남 19 사단은 북반부를 담당했다.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되자 20 사단은 뉴기니 전선에 투입했으나 전멸했다. 1944년 XX 사단은 필리핀 루손으로 이동하여 산악전투를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관동군을 중국도 소련도 힘겨워했다. 그만큼 관동군은 훈련의 강도가 높았고 일본 본토에서 진행하는 군인 유도 대회에 본토 주둔 일본군과 겨루어 체급별 유도 우승 트로피를 휩쓸어 왔다.


유도 잘하는 것 하나로 군대 사격이나 다른 모든 것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기와 자긍심은 높았다.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 소련이 참전한다고 선포하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부대는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의 산악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중대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정도의 큰 동굴을 구축했다. 전투에 대비한 개인호도 팠다.


흥안령(興安嶺) 산맥줄기를 따라 8월까지 참호를 구축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전황이 불리하면 유언비어도 늘어나는 것이 전쟁이다. 소련군 무장 첩자가 중국인 길 안내 잡이와 노새를 끌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온 부대가 중국인 길잡이와 소련군 첩자를 잡아내라는 지시에 온 부대가 발칵 뒤집어졌다. 부대원끼리 인심만 나빠지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45 년 8 월 9 일 오전 00 시 소련은 전격적으로 150만 명 대규모 군단을 꾸려 만주 관동군을 공격했다. 일본은 지난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을 한 상태라서 도와 달라 요청도 못했다.


만 45 세 이상의 예비역까지 총동원령을 내렸다. 구호가 강경해질수록 일본의 패망은 다가오고 있었다. 170만 명의 병력에 화력까지 간춘 소련군의 공격은 일본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본토는 미국이 초토화시키고 관동군은 패배하였다.


일본 황궁에서 최고회의가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전쟁은 의미가 없다고 끝내야 한다고 말하자 육군 장관이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매파 목소리에 비둘기파 말은 묻혀버렸다.


8 월 9 일, 소련은 육군 공군 합동으로 관동군을 공격했다. 주둔지 상공에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지나갔다. 산악지대에 대피호와 갱도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으나 소련군 공습은 큰 타격을 주었다. 여기저기 시체가 나뒹굴었다. 차량도 파손되고, 군수품 창고도 부서지고 불이 났다. 철도도 파손되어 기차 수송이 중단되었다.

천황의 항복조서가 8 월 15 일 정오,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발표되었다.


일본의 극우파가 천황의 녹음테이프를 탈취하여 항복 발표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일본군 각 부대에 기밀문서를 소각하라는 지시를 했다.


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를 통해 천황의 항복조서가 발표되었다. 관동군에는 바로 시행되지 않았다. 소련의 공습에 통신망이 두절되었다. 지상군 전투에서도 소련군과 싸워 패한 관동군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여기저기 패잔병을 모아 부대를 구성해 보려 애를 썼다.


만주일대에 참호를 파고 지탱하던 3727 부대도 8 월 16 일에도 일본 패망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소련군 전차가 눈에 띄게 많이 움직이고 산악은 쳐다보지도 않고 큰 도로와 대도시 주변으로 탱크를 몰고 질주했다.


장애물도 없었기 때문에 전차는 속도를 내고 달렸다.

그가 일본인 선임 병에게 물었다. 왜 요즘 중대장 얼굴이 표정이 밝지 못하냐고 물었더니 너만 알고 절대 소문내지 마라 하면서 일본이 연합군에 패해서 천황이 항복했다고 말했다. 이제 부모님과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일본인 병사가 다가와서 전쟁에 질 때도 있는 법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라 위로해 주었다.


일본이 패망해 자신이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기쁨과 부모님 생각에 눈물 흘린 것을 일본인 병사는 일본 패망이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착각했다. 3727 부대에는 만주 일대에서 징용된 청년도 있었다. 치치하얼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중대 별로 소총과 수류탄을 일정한 장소에 집결시켰다. 병사 한 명이 집결시킨 소총 대열에 자기 총을 집어던졌다. 총이 도미노 넘어지듯 넘어지면서 탄알 일발 장전되었던 총하나 가 격발이 되었다. 탕! 소리와 함께 대열 중 한 명의 병사가 즉사했다. 오발은 명중이라고 그 탄알이 바로 턱밑에서 오른쪽 귀를 관통했다.


총을 던진 병사를 일본군 장교가 개머리판으로 개패 듯 팼다.

병사 입에서 코에서 피가 흘렀다. 일본말을 잘하는 엄 태흥이 일본어로 항변했다.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는데 조용히 일본으로 귀국하고 싶으면 이런 행패 부리지 말고 지내라고 했다. 그 말에 일본 장교가 그 소리 어디서 들었느냐? 고 물었다. 그게 뭐 그리 이 시국에 중요하냐? 내가 라디오를 통해 천황이 항복하는 방송을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 라디오 가져오라고 했다. 그 라디오는 내 라디오가 아니라 총에 맞아 죽은 병사 거라고 말했다.


일본 장교는 할 말을 잃었다. 라디오 가져오면 왜 소지했냐고 혼내려 했는데,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죽은 병사의 라디오라고 하니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중국어를 모르니 허허벌판 넓은 중국 땅에서 도망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으로 가기는 해야 했으나 갈 길이 막막했다. 들리는 소문에 다른 지역 일본군 지휘관이 솔직하게 일본이 연합군에 이번 전쟁에서 패했다. 여기 일본인 병사가 아닌 병사는 조선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부대장은 끝까지 조선인 출신 병사도 일본인 병사와 똑같이 대열 이탈을 막았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만주인 중국인들과 사이에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면서 조선인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일제가 세운 만주국은 유색인종을 학대하고 차별하는 백인들의 식민주의와는 다르게 만주국은 일본, 조선족, 한족, 만주족, 몽골족 이렇게 5 개 민족 사람들의 협력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했다.


그것은 선전뿐이었다. 식량배급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 한족 만주족 몽골족의 배급표의 색깔이 달랐다. 일본인에게는 쌀과 설탕을 많이 주고, 만주족, 한족, 몽골족은 쌀은 없고 수수, 콩 같은 잡곡을 지급했다. 조선인은 쌀도 약간 설탕도 조금, 잡곡도 주었다. 그러니 만주족과 한족 몽고인이 조선인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조선인은 만주족 한족에 대하여 자신이 일본인도 아니면서 만주족 한족을 경멸하고 조금만 이상해도 일본 간수나 공직자에게 밀고를 하게 만들었다. 일본이 교묘하게 5족을 이간시켜 통치하는 것을 모르는 우매한 조선인은 만주에서 그렇게 생존했다.


일본군은 러·일 전쟁에 승리하자 소련 군대를 깔보고 있었다. 일본이 독도 앞바다애서 물리쳤던 그런 군대가 아니었다. 193X 년과 3X 년 경 일본과 소련은 ‘장구 펑(張鼓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했다.


관동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보다 병력과 장비 모두가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일본과는 중립조약을 체결하면서 자구책을 모색하고 2 차 대전에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


독일은 1941 년 6월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 영내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다. 모스크바 도시의 접경까지 진격을 했다. 소련은 국가 존망의 위급한 상황에도 극동지역에서 병력을 이동시킬 수가 없었다. 일본이 소련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경계했다.


소련군 극동군 사령부 예하에 병력 100만 명, 전차와 자주포 2,000 대, 비행기 3,000대의 전력을 보유했다.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는 서부전선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극동지역으로 이동시켰다. 반면 일본 관동군의 병력은 70만 명, 야포 1,000 문, 전차 200 대 비행기 200 대 정도였다.


일본은 전시 총동원령을 내려 소년병과 나이 든 예비역까지 모두 징집시켰어도 소련군에 미치지 못했다. 지휘부 장군들도 전투력의 열세를 알았다. 천황의 부대는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일당 백 일당 천을 구호로 외쳤다.


구호가 일당백이라고 한 명이 백 명의 소련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항복하고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하자 만주는 치안 공백이 생겼다. 일본이 8월 15 일 항복했을 때, 미국은 만주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여러 섬에 흩어져 있는 일본 병력을 누가 접수하고 무장해제를 시키고 포로를 다루는 가를 고민했다.


미국과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일본 본토와 조선은 맥아더 원수가, 중국 대륙은 장 총통이 동남아시아는 마운트배튼 경, 대만은 위드 마이어 장군이 맡기로 했다. 대일본 전쟁에 늦게 참전한 소련은 작전이 종료될 때 지배하는 지역에서 일본군을 접수하기로 했다. 중국군 관할이 135만 명으로 가장 많고 소련군 관할이 68 만 정도였다.

9 월 2 일 미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포고령 1 호를 발표했다.

―일본은 패망했고, 38선 이남 지역은 미군이 점령 통치한다. 남조선 사람들은 경거망동하지 마라. 영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될 것이다.

― 포고령 2 호는‘한국인은 미 군정청에 소속되는 법정에 의해 재판을 받을 것이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할 것이다.

한편 소련군 사령관은 북조선에 포고문을 내렸다.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는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를 추방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조선 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 모든 것이 당신들에게 달렸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8 월 18 일 참모총장은 천황의 지시를 받들어 지난 8월 15일 천황의 조서 발표 이후에 적군의 통제에 들어가 있는 제국군인과 군속들은 포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자결하거나 결사항전 하라는 지시였다. 군인칙유를 실천하는 세부행동강령으로 천황의 군인이라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만들었다. 제1 장 제1 조는 황국이다. 대일본국은 황국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위에 계시면서 조국의 황모를 이어받아 무궁하도록 군림하신다. 황은이 만민에게 미치고 있다. 포로가 되면 자결하는 간부가 많았다. 관동군 장교들은 자신들이 포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스탈린은 극동군 사령관에게 지령을 내렸다. 일본인 포로 50만 명을 소련 내 포로수용소에 보내 노역을 시킨다는 지시였다. 포로 숙소와 수송수단의 확보, 포로에 대한 식량 배급표도 미리 작성했다. 그 지령에 따라 일본군 포로 60만 명이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모스크바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극동 시베리아 하바롭스크 지역의 공단 개발에 포로들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포로 중에는 사할린까지 이동하여 노역을 하는 포로가 있었다. 포로는 군대 조직이 아닌 포로 작업 단위별로 200 여 명을 한 조로 만들어 각 공장지대 작업이나 철도 보수 작업, 신규 도로 공사 등에 투입되었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밀담을 했다. 스탈린은 대일 전쟁에 참가한 반대급부로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소련이 지배하게 편입을 요구했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와 일본 본토를 점령했다. 미국이 일본 본토를 공격했다. 일본군 수비대는 부녀자까지 동원하여 미군의 본토 진입을 막으려 저항했다.

탄약이 떨어지면 대검과 수류탄으로 자폭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그렇게 자결을 감행했다. 오키나와 청년들은 인간 폭탄도 되었다. 미군들의 전차가 오키나와 시가에 등장하자 자기가 등에 질만큼의 상자를 짜서 폭탄을 담고 전차로 돌진해 전차와 함께 산화했다. 사람 한 명이 전차 한 대와 같이 생명을 버린 것이다.

새벽 일찍 건빵으로 배를 채우고 후임 병들에게 사격을 가르쳤다. 신병교육대에서 1 개월의 훈련을 받았지만 1945 년 1월 이후 병사들은 신병교육 없이 바로 부대로 왔다.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군의 기세는 거대한 파도처럼 구미 열강의 식민지를 하나하나 점령했다. 필리핀의 많은 섬을 점령하고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성채였던 싱가포르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을 때 일본군이 세계 최강 군대임을 실감했다. 전쟁지도부는 흥분했다.

눈사람 만들 때 불어나는 눈덩어리처럼 연합국의 포로가 늘어났다. 일본군은 승리의 함성과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반년 후 연합국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일본군의 포로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남방 군 총사령관은 포츠담 선언 수락을 거부했다. 관동군 장교들은 자신들이 포로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천황의 명령으로 잠시 전투가 정지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극비 지령을 실행하였다. 관동군 포로를 열차에 태워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포로는 50만 명이 넘었다. 소련에서 죄수들에 대한 강제 노동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도 있었다. 러시아는 동방 진출을 위해 시베리아 유형지에 죄수나 정치범을 이송해 강제 노역을 시켰다. 쥐꼬리 정도의 적은 노임이지만 노임도 지불했다.

스탈린은 극동지역 공업화 추진에 부족한 노동력을 죄수들로 충당하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 포로를 이용했다.

극비지령으로 아버지가 속한 부대도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소련은 1,000 명 단위로 포로 작업부대를 편성했다. 포로들로 가득 찬 화차 행렬은 북쪽으로 달렸다. 일본군 장교와 병사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연해주 항구에서 배를 타고 일본 본국으로 귀향하게 될 것이라고 그럴듯한 소리를 하였다. 기차가 이동하면서 기차 창밖으로 자작나무 침엽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바다처럼 보이는 곳에서 기차가 정차했다.

병사들은 일본해라고 외쳤다. 정말 바다처럼 넓은 시퍼런 물이 잔잔하게 물결을 일으켰다. 바이칼 호였다. 얼마나 넓은지 끝이 안 보여 일본 병사가 일본해라고 소리를 지를 만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하여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철도에서 바이칼 연안을 지나는 구간이 거의 200 킬로미터에 달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열흘 정도 달려서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5 천 킬로미터를 달려온 것이다. 함 재석은 제5 포로수용소에 배정되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정치범들의 수용소로 이용했던 곳이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제5 수용소는 창문도 이중창으로 되었다. 그만큼 한기를 막아주었다. 재수가 없는 포로 부대는 1 천 명의 포로가 막사가 아닌 텐트생활을 하는 부대도 있었다. 8 월 15 일 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고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조선인 징용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 장교와 병사를 무차별 죽창으로 찔러 죽인다는 유언비어였다.

조선인 징병 포로는 현지서 은밀히 총사시키라는 극비 지시가 내려졌으나 소련이 먼저 일본군 무장해제로 총기를 압수해서 그 지시가 시행할 수 없었다는 말도 돌았다. 시베리아 각 지역으로 분산 배치된 포로들은 1945 년 12 월에서 1 월 겨울에 수용된 포로의 4분의 1 정도가 사망했다는 소련 극동군 사령부의 통계가 있다.

사망 이유는 혹한, 기아에 중노동이 원인이었다. 일본군 포로는 59 만 4천 명이었고 그중에 장교가 12만 명이었다. 1945 년 겨울에 4 만 3 천명이 얼어 죽었다. 급식이 부실한 상태에서 중노동으로 허약해진 포로에게 장티푸스와 이질이 돌아 떼죽음을 했다. 아버지의 제4 포로수용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천명으로 시작한 포로 작업대가 900 여 명으로 줄었다.

작업부대는 감자 수확에 동원되었다. 작업을 하다 겨울에 죽은 포로는 매장을 하지 못했다. 일정한 장소에 모아 두었다가 이듬해 4,5 월쯤 완전한 해동이 풀리면 그때 땅을 파고 매장을 했다. 포로수용소의 식량사정도 어려웠다.

소련은 김일성을 북조선을 통치자로 내세웠다. 9월 19일 김일성은 소련 트카초프 호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항해 원산항으로 입항했다. 김일성을 따르던 조선인 60여 명이 소련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일본군은 한반도 방위를 위해 1월 20 일자로 ‘제국 육군 작전계획 요강’을 발표했다. 한반도에 제17 방면 및 조선관구가 신설되었다. 제17 방면군은 전투부대로 조선의 방위를 책임졌다. 조선관구사령부는 조선 내에서 부대를 통솔하여 병력보충, 교육, 보급품 조달, 위생업무 등을 담당했다. 3월부터 조선에 병력이 대대적으로 증강되었다.

4월 1 일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다. 일본은 본토의 위협을 느꼈다. 일본군은 연합국의 다음 상륙 목표가 제주도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제주도 방위를 위해 서울의 제58 군사령부를 신설했다. 4월부터 5 월말까지 만주의 관동군에 있던 제111, 120, 121 세 개의 사단이 제주도로 이동했다.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일본군 전쟁지도부의 조치였다. 예하부대들은 제주도에 한국인 징용자들을 동원해 땅굴을 팠다.

제주도 주요 거점을 거미줄 식으로 교통호를 팠다. 동서남북 주요 지점에 무기를 은익 할 수 있는 공간도 준비했다. 오키나와가 6월 25 일 함락되었다. 일본과 제주해협의 해상보급로가 차단되었다. 7 월부터 8월 6 일까지 B-29기는 청진, 나진, 웅기 등의 앞바다에 수중기뢰를 투하했다. 1945 년 5월 30 일에 ‘만선(滿鮮) 지역 대소 작전계획 요령’에 관하여 관동군과 제17 방면 군에 소련의 조선 침공에 대한 준비명령이 하달되었다.

제17 방면군은 남조선에서 조선 남부에 미군이 상륙할 것에 대한 대비를, 북조선에 대하여는 관동군이 막으라는 지시를 했다. 일본은 연합국이 38 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에 미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할 것을 미리 알았다.

관동군은 제3 군단을 연길에 군단사령부를 두고 3-4개 사단과 독립 혼성여단 및 기동 1 여단을 만주로 이동시켜 소련군의 북조선 침공에 대비했다. 연해주에서 만주로 침공한 제1 극동 방면 치 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제 XX 군이 북조선으로 침공했다.

8월 12일부터 남하하여 전차를 선두에 몰고 북조선을 진입했다. 일본군은 인간폭탄을 운영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청진이 함락되고 일본군은 원산, 청진, 함흥 등 각 지역에서 패배의 연속이었다. 38선 전역을 석권한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했다. 포로를 만주를 경유하여 시베리아로 이동시켰다.

그가 속한 포로 중대는 절반은 철도 선로 보수작업에 동원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나무 벌목에 동원되었다. 철도 선로 보수작업 간 인원 중에 운이 좋은 사람은 역에서 화물 하역조로 빠졌다. 선로보수 나간 사람은 역에 남는 포로들을 부러워했지만 하역 작업을 하는데, 하얀색 석회 같은 물건을 나르는 일은 고역이었다. 마스크나 수건을 지급해주지 않고 작업을 시켜서 작업을 하고 나면 콧속으로 하얀 가루가 들어가 냄새도 꼭 멀미하기 직전의 빙빙 돌고 니글거리고 토하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소련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8 시간 노동을 국가의 법으로 정한 것을 포로들에게도 적용한다고 자랑을 했다.

포로들은 아침 6 시에 기상했다. 6시 30 분까지 점호와 구보를 하고 아침 식사를 했다. 8시 전에 집합해서 정확히 8 시면 각자의 작업 장소로 이동했다. 오후 5 시 작업을 마치고 포로수용소로 돌아왔다. 고달픈 포로수용소 생활에 조선인은 더 고달프게 일본인 보다 조선인이 더 차별을 받았다. 소련 말을 조금 익힌 조선인 포로들이 소련 포로수용소 간부들에게 항의를 했다. 우리는 조선인이니 조선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조선인 포로들은 대부분 징병 1,2 기들이었다. 계급도 대부분 말단 이등병이었다. 수용소 막사에서 식당청소 당번, 연병장 청소당번 등 궂은일은 조선인 병사들에게 시켰다. 일본이 패망했는데도 소련군은 포로들을 통제하기 쉽게 하느라 일본군 장교를 그대로 포로수용소에서도 지휘자로 이용했다. 궁성요배와 군인칙유를 묵인해 주었다.

드디어 조선인 포로들이 참다 참다 폭발을 했다. 비교적 소련 말을 잘하는 엄 태흥이 유창한 소련 말로 내일부터 우리 조선인은 별도의 점호를 하겠다. 포로 작업반도 조선인끼리 편성해 달라. 국제법규로 따지자면 일본이 패망했기에 일본인 포로는 포로지만 조선인이나 만주인, 또 한족은 각자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고 따졌다. 조선인 포로들이 엄 태흥의 그 말에 박수를 쳤다. 포로수용소장은 엄 태흥의 말을 들어 조선인 별도의 포로중대를 만들고 막사를 조정해서 조선인 막사를 별도로 해주었다. 이에 신이 난 조선인 포로는 막사 입구에 태극기를 걸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태극기를 정확히 그릴 줄 아는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엄태흥이 기억을 더듬어 태극기를 그려 조선인 포로 막사 입구에 게양을 했다. 아침 점호에 궁성요배 대신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애국가는 찬송가 곡조에 맞추어 애국가를 불렀다. 점점 조선인 포로들의 단결심은 굳어졌다. 엄 태흥의 주장에 따라 여기 포로수용소장이 조선인 포로에 대한 포로 기록부를 다시 작성했다. 본인 이름, 부모 이름, 출생지, 본적, 일본군 복무 부대명 등을 기록했다. 포로수용소장은 조선으로부터 소련에 포로를 귀환시켜 달라는 요청이 오면 조선인 포로를 일본인 포로 보다 먼저 보내주겠다는 말을 했다. 조선인 포로들은 만세 삼창을 했다.

―만세!

―만세!

그렇게 포로생활을 하던 중에 1948 년 10월 시베리아 각지에 흩어져 노역을 하던 포로들이 하바롭스크에 집결했다. 그와 엄 태흥이 속한 포로부대도 포로집결소로 이동했다. 조선인 포로들은 준비된 배에 올랐다. 목적지는 북조선 흥남 항이라고 했다. 포로들은 일제히 시베리아 한의 노래를 불렀다.

― 시베리아 물결아~

잘 있어라 자작나무야

너의 품에 자란 어린이들은

내 고향 찾아 떠나련다

시베리아여

우리들의 자유와 청춘 보람을

심어주던 정든 고향 시베리아여―

흥남으로 가는 배는 허름했다. 하지만 배가 무슨 문제인가 고향 찾아 조선 땅으로 가는 것에 포로들은 들떠 있었다. 흥남부두에는 군악대가 대기하며 배가 도착하자 연주를 했다. 배에서 내려 흥남여고 운동장과 강당에 마련된 임시 포로수용소로 갔다. 찬송가 곡조에 맞추어진 ‘애국가’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 ‘독립군가’ 등이 연주되었다.

흥남여고에서 포로 심사를 받았다. 북한이 고향인 포들부터 고향으로 갈 여비를 주고 포로를 보내주었다. 남한이 고향인 사람은 1949 년 1 월이 되어서야 북한에서 마련해 준 여비를 받아 출발했다. 가까운 개성은 500 원, 서울 경기는 1500 원, 강원도 충북은 2000 원 제주도는 3000 원 경상도는 2500 원 등으로 여비를 차등지급받았다. 북한의 인솔간부가 38 선 부근 한탄강까지 안내해 주었다. 남조선 국군 경비병에게 발견되면 사살당할 수 있으니 밤에만 이동하라고 안내 간부가 일러주었다.

그와 엄 태흥 등 100여 명의 포로들은 밤이 되자 살금살금 38 선을 넘어 남하했다. 하지만 보초 서는 군인들의 눈은 피했는데 아침에 파주 순찰 중인 경찰에 붙잡혔다. 굴비 엮듯이 파주경찰서에 잡혀가고, 간단한 이름과 본적주소만 파악하고 바로 인천의 전재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전재민 수용소에서 그동안의 행적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그와 엄 태흥에 대하여는 관동군 근무 경력과 포로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으라고 해서 사실대로 진술했다. 아버지는 전재민 수용소에서 바로 풀려나 강원도 횡성 고향으로 왔다.

엄태흥은 전재민 수용소에서 대기자로 분류했다. 소련군 포로수용소에서 소련어로 의식적인 행동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북한에서 태흥이 불의에 대한 저항한 경력과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을 문제 삼았다. 태흥을 북한에서 간첩교육을 시켜 내려 보낸 것으로 판단한 전재민 수용소의 신문관이 태흥과 몇 명의 지식인 귀환자를 경기도 경찰국 정보과로 이첩했다.

고향 횡성에 와서 농사를 지었다. 한창 농사일이 바쁜 6월에 소집영장이 나왔다. 청일면사무소로 가서 따졌다. 일본군 징용으로 끌려가 고생하고 소련 땅 시베리아에 포로로 강제 노역까지 했는데 도 군대를 가야 하냐? 고 따졌다. 병무담당 주사는 일제의 징병은 징병이고 우리나라 법에 따라 병역을 필하지 않은 젊은 사람은 다시 군대에 가야 한다고 했다.

논산 훈련소로 입소를 했다. 사격이나 제식 등은 일본군에서 배운 것이나 다른 것이 없었다. 신병교육을 마치고 배치된 곳이 김 XX장군이 지휘하는 개성 근처의 수도 사단이었다. 이곳은 북한에서 흥남여고에서 포로 심사를 마치고 남으로 내려올 때 야간에 국군의 경계초소를 피해 은밀하게 내려온 곳이다. 그곳에서 군대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군복을 입고 군 생활을 하는 도중 6.25가 발발했다.

변변한 무기도 없는 국군에 비해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우고 개인 소총도 모두 휴대하고 밀려왔다. 수도사단과 전방의 국군은 북한의 공격에 제대로 방어전을 해보지도 못하고 서울을 포기하고 수원 이남으로 퇴각을 했다. 부대라고도 말할 수 없는 패잔병들이 삼삼오오 남쪽으로 이동했다. 함 재석은 서울에서 한강다리가 폭파되어 한강을 우회하려는데 헌병에게 붙잡혔다. 헌병은 전방에서 철수해 온 병력을 일정한 장소에 끌어 모았다. 용산 고등학교 운동장에 전방에서 후퇴한 병력들을 모았다. 한편 후방에서 급히 소집되어 올라온 지원병도 용산 고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중위 계급장이 번쩍이는 한 장교가 호각을 삑~~ 불었다.

―제군들! 주목하라!

이곳에는 전방에서 전투 경험이 있는 후퇴한 장병도 있고 후방에서 소집되어 지원군으로 올라온 신병들도 있다. 우리는 이 승만 대통령님의 명령으로 수도 서울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금부터 이곳 용산 고등학교를 떠나 미아리 고개 방어 지원을 위하여 이동한다. 대열을 이탈 시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이다! 알겠는가?

―예~~

―목소리가 작다 알았는가?

―아야!

―좋다! 이 목소리처럼 사기충천한 우리가 서울을 사수한다. 가자!

―앞으로!

―앞으로!

500여 명의 군인들이 2열 종대로 이동했다. 용산, 갈월동, 서울역, 명동, 종로, 혜화동을 지나 미아리로 향했다. 아리랑 고개에 배치된 군인들과 500여 명의 새로 도착한 군인이 방어진지를 재구축했다. 분명히 전방에서 우리 국군이 패하여 퇴각을 한 것인데 라디오 방송은 우리 국군이 반격을 하고 있다고 방송이 나왔다. 국방부 선무 방송은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고 다니면서 서울 시민을 안심시키는 방송을 했다.

―친애하는 애국 시민 여러분! 6월 25 일 새벽을 기해 남침한 공산군을 우리 국군은 격퇴하고 추격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애국 시민 여러분은 추호의 동요되심이 없이 각자의 생업에 복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애국 시민 여러분!

―저 새끼들은 국군이야, 공산군이야?

―시민들이 빨리 피난을 가야 우리 국군이 마음대로 시가지 작전을 하지 시민들 피난 못 가게 저런 방송하고 서울이 공산군에 포위되면 어떻게 하려고 저 지랄이야?

―씨팔~~

―병신들 우리가 탱크가 있어 포가 제대로 있어?

―야, 총도 모자란다. 후퇴하여 여기 미아리 고개까지 왔는데, 공산군을 추격한다고 거짓 방송을 하니.......

―국방장관 그 새끼는 각하! 명령만 내리시면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을 먹는다고 하고 어디로 도망갔어?

―야, 그만해라. 여기서 우리 싸우다 죽고 다음 생에 태어나면 권력 있는 집안 자식으로 태어나자?

미아리 지역에 여기저기 쿵! 쾅! 산발적으로 적의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500여 명의 지원군이 와서 미아리 고개 방어 진지 구축은 빨리 구축되었다. 미아리 고개 약수터에 피난을 안 간 시민들이 약수터에 물을 뜨러 왔다. 아버지도 모처럼의 휴식을 하면서 약수터 시민과 담소를 했다. 시민들은 주머니에 넣고 온 주먹밥을 군인들에게 주고 갔다. 선무방송을 하는 지프차가 지나갔다. 여전히 애국 시민으로 시작해서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선무 방송 차량이 왔다.

미군의 B-29 폭격기 편대가 평양과 원산을 폭격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동해 상공을 지나고 있다고 했다. 약수터 시민들이 박수를 쳤다.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미아리 북방에서 대포소리가 다시 들렸다. 약수터 시민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내려갔다.

라디오 방송으로 아나운서의 비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맥아더 군사령부가 한국군을 돕기 위하여 작전 본부를 한국에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애국 시민 여러분! 우리 국군과 미군이 공산군을 곧 퇴각시킬 것입니다.

그런 방송이 나올 때 어디서 숨었다가 나타났는지 좌익 청년들이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했다. 문을 부쉈다. 좌익 청년들은 죄수들을 풀었다. 카빈총 끝에 붉은 천을 달고 반동분자들을 색출한다고 시내를 누비고 있었다. 서울에 T-34 전차가 나타났다. 인민군 서울 입성 대회가 열렸다. 노인, 아이, 부녀자들은 큰 도로변에 집결해 인민군 탱크와 도보부대가 지나갈 때 박수와 만세를 부르도록 사전 교육을 시켰다. 어디선가 지프차에 확성기를 부착한 선무 방송이 들려왔다.

―남조선, 서울 시민 여러분! 미제의 압제에서 이제 우리 민족은 해방되었습니다. 위풍당당한 탱크와 인민해방군이 지나는 길의 애국 시민 여러분 만세와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쳐주기 바랍니다.

서울 시내 큰 도로에는 현수막이 걸렸다.

―김일성 장군 만세!

―인민 공화국 만세!

전단이 뿌려졌다. 서울이 온통 붉은 깃발로 넘쳐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맹원(女盟員)’이 ‘김일성 장군 만세’ 선창을 하면 시민들은 ‘김일성 장군 만세’를 복창을 하고 있었다. 여맹뿐만 아니라 빨강 완장을 두른 청년단이 여기저기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길거리에 신문 ‘조선인민보’와 ‘해방일보’가 뿌려졌다. 신문은 김일성의 대형 사진과 함께 미 제국주의 압제에서 남조선을 해방하였다는 제목의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3 일 만에 서울을 해방한 것은 감격이라고 표현했다. 김일성 사진과 스탈린 사진을 나란히 실은 유인물이 공산군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 뿌려졌다. 표어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들이었다.

―조선 인민의 경애하는 수령이시며 민족의 영웅이신 내각수상 김일성 장군 만세!

―진정한 인민 정권기관인 인민위원회 만세!

―서울시 전체 남녀 공민들이여! 조선인민들의 가장 우수한 아들 달들인 인민군을 힘을 합하여 도와주자!’

김일성에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 충성의 편지가 쇄도했다. 민족해방전쟁이 끝나면 군사재판에 회부될 민족반역자의 명단이 소개되었다. 이 승만, 이 범석, 김성수, 신성모, 조병옥, 백 욱, 윤치영, 신흥우, 신익희, 장면 등이었다.

서울시 임시 인민위원회는 과거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주권에 적대행동을 한 자라도 지금 과거의 죄과를 청산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조국통일 성업에 진심으로 동참하려고 하는 자들은 모두 자수청원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이번 자수청원서를 제출하는 자들은 과거의 죄가 아무리 커도 다 용서한다고 했다.

제일 먼저 자수청원서를 제출한 사람은 송호성(宋虎聲)이었다. 송호성은 선무방송을 통해 ―나는 국군 2 사단장을 지냈고 호국 군의 총사령이었습니다.

인민군대가 인민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는 군대라는 것과 인민정권은 조선인민을 위한 정권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3 천만 동포 여러분! 인민군을 나처럼 도와 총부리를 인민의 원수 미제와 매국노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합시다!’라는 내용의 선무방송을 했다. 송 호성의 자수를 이어 안재홍(安在鴻)이 나타났다. ‘나는 미 군정시기에 군정장관을 지냈습니다! 나는 미제의 주구였습니다! 오직 미제의 침략적 야망의 도구로 이용된 것을 진실로 뉘우치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조국 해방 전선에 동참합시다!―

1950 년 9월 15 일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으로 밀리던 6.25 전쟁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인천상륙작전이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이 작전은 미국이 보존기간이 끝난 비밀을 해제한 문건에 보면 이미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할 시에는 한반도의 어느 정도까지는 후퇴했다가 인천 정도에서 상륙을 하여 이미 남하할 만큼 남하한 공산군을 쌀자루에 담아 버리듯이 포위작전을 미리 수립했던 것이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국군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공군의 우세를 앞세워 연합군이 북진을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낙동강까지 전진한 북한군의 선두는 인천상륙 작전과 수도 서울의 탈환으로 후방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아버지는 미아리 전투에서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처음에는 포로였는데 의용군 자원입대 원서를 쓰고 인민군대의 포탄 운반과 장전을 도와주는 탄약수가 되었다. 인민군 복장과 포탄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 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로 이송이 되고 포로 신문과정에서 나는 원래 국군이었다. 국군 이전에는 일본군 징용으로 만주에서 관동군의 일원으로 소련과 싸웠다. 일본이 패망하고 나는 일본군으로 분류되어 시베리아 포로 강제 노역도 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군대 소집 영장이 나와 입대를 했고 미아리 전투서 패하여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다. 총구를 들이대고 의용군 입대 원서를 강요해서 원서를 쓰고 탄약 운반을 하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진술했다.

7. 27 일 휴전이 되었다. 얼마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고향 땅 횡성에서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자식의 교육에 대해서 남다른 집념이 있었다.

촌에서 공부 잘해봐야 도시 가면 중간 정도도 힘들다고 일찍 수주 초등학교 6 학년 때 서울로 위장 전학을 시켰다. 강림서 1 등 하던 촌놈이 서울 D초등학교에서 첫 시험이 77 명 중에 35 등을 했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내 청춘은 3 벌의 군복에 흘러갔다고 한탄하셨다. 처음은 일본군 군복 다음은 국방군 군복, 마지막은 공산 의용군 군복을 입었다. 그는 의용군 군복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중앙정보부에 잡혀갈 시절에도 3 벌의 군복을 꼭꼭 숨겨두셨다. 그 군복은 집안 장롱이 아닌 외양간 건초를 저장하는 천장에 3 벌의 군복을 삼베 보자기로 싸고 겉을 볏짚으로 싸서 완전히 아버지 이외는 찾을 수 없게 숨겼었다. 장남인 나에게만 가르쳐주었다. 그것이 횡성서 서울로 전학을 가기 하루 전날이었다. 전학 수속을 다 마친 아버지는 너 서울 가면 여기서처럼 공부하면 중간도 못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고 했다. 집중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아마도 너는 서울로 공부하러 가면 내가 죽을 때나 고향을 온다는 각오로 공부면 공부 일이면 일을 해야 한다.

이건 네 동생들과 엄마에게도 비밀이다. 내가 죽으면 내 관에 3 벌의 군복을 함께 넣어 다오 하시면서 군복이 있는 장소를 나를 데리고 갔다.

외양간으로 갔다. 비스듬하게 사다리가 놓여있다. 사다리를 오르니 대들보 끝에 삼배 보자기로 군복(관동군, 국군, 의용군)이 있었다. 197X 년 고 3이 되었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땅을 야금야금 팔아서 나의 서울 생활과 학비를 조달하는 것을 알고는 국비로 공부하는 육군 사관학교에 시험을 봤다.

198X 대학입시를 19XX 년 가을에 육군 사관학교 3X기 필기시험 국어, 영어, 수학을 봤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예비고사 성적도 합격자의 상위권 점수를 넘는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3 차 신원조회라는 것이 있었다. 횡성 지서장이 아버지를 불렀다.

―하재석 씨 아들 근호 학생 공부 잘해요?

―잘하지요. 항상 1 등만 하다 전학시켰는데, 전교 10 등 안에는 들어요.

―그러시면 서울 대학교를 보내지 왜 육사를 보내셨어요?

―아니, 육사 안 보냈어, 서울 대학교 갈 겁니다.

―에이, 어르신 어제 원주에 있는 보안부대서 간부가 다녀갔어요. 뭐 잘 못 한 것이 없는데, 보안부대 간부가 나타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알고 보니 진호가 육군사관학교 필기시험, 예비고사 점수 다 이상이 없어서 신원조회 차 왔는데 모르게 갈 수도 있으나 그 대위 보기에 점수가 좋은데 신원조회 안 되니 혹시 공사 하나만 바라보고 본고사 준비 안 하면 성적 좋은 학생이 낙방한다고 미리 육사 아닌 일반대학 본고사 준비 시키라고 알려주라고 해서 이렇게 찾아뵌 것입니다.

―그놈, 고집이 사관학교는 의용군 전력 때문에 안 된다고 일렀거늘.......

―그러니, 어르신 아드님 기분 나쁘지 않게 본고사 준비 잘 시키세요.

―고맙습니다.

―뭐요, 다 아드님이 공부 잘하니 다들 옆에서 도와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사실 보안부대 대위에게 어르신 젊은 시절 새마을 지도자도 했고, 횡성 발전 위해 기부도 많이 하고 좋은 분이라고 어필했는데, 그 대위 말이 이미 의용군 자원입대 기록이 있어 장교는 절대로 안 된다고.......

사관학교 낙방하고 명문대만 응시하다 안 되어 고졸학력으로 눈물겨운 사회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보내준 돈으로 먹고 지내면서 S 대학에 다닌다고 편지를 했다. 재수를 했으나 또 떨어졌다. 5공 시절 입영 나이를 줄이는 바람에 삼수(三修) 중에 군대를 갔다.

제대하고는 머리도 굳고 시험방식도 예비고사 본고사가 아니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작은 회사를 전전하다 건설 일용직 근로자가 되었다. 화천에서 일하던 중에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숨겨둔 군복을 관에 넣어드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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