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으로 관동군 7396부대에 징집되었다. 나남에 19사단 용산에 20사단을 주둔시킨 일본은 조선땅 북쪽은 19사단, 남쪽은 20사단이 담당했다.
괸동군 7396 부대에 근무하던 제갈재석은 일본군 장교들이 수상한 은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었으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중국군 포로가 알려주었다. 포로 말에 의하면 일본은 곧 패망한다. 조선은 광복을 맞이한다고 했다.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벌판 개발에 노력동원된 것이다. 국가가 있고 힘이 있어야하느데 1945년 8월 15일 굉복이 된 관동군 7396부대원 제갈재식은 일본군 포로 중 한 명으로 취급되었다.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시베리아에서 노력동원을 하던 중에 조선으로 귀환 소식을 들었다.
소련화물선을 타고 1947년 12월 흥남항에 도착했다. 흥남여고에 임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흥남여고 운동장에 임시텐트를 치고 귀환포로 심사를 받았다. 고향이 평양, 신의주 , 함흥, 사리원,혜산 출신부터 심문을 받고 해당지역 거리의 여비를 받고 먼저 출발했다.
남은 인원은 남한 출신 900명앴다.
그 많은 인원을 고향까지 데려다 줄 수 없었다. 생각한 깃이 고향까지 거리에 해당하는 교통비와 하루의 숙식비를 환산하여 돈으로 지급하고 38선을 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