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밍한 맛

관계의 죽음, 그 애도일기 03

by 심심

어제는 글을 좀 쓰다가 뒷산에 다녀오고 저녁에는 영화 시사회에 갔다가 술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쓴 어제의 애도일기 덕분일까? 그걸 쓰면서 내가 왜 그를 좋아했는지가 명료하게 개념화해서 Get 하고나니 하루종일 마음이 평안했다.


내가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을 때, 그 소용돌이 안에 있을 때는 어찌 그 감정을 떼어낼 방법을 자꾸 궁리할수록 달리 방법이 없고, 그 감정 속으로 쑤-욱 밀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반면, 이렇게 밍밍한 맛의 날도 찾아오는 게 신기하다. 이러다가 또 어느날 문득 훅- 하고 그리움이나 아쉬움이 찾아오겠지? 또 그러다가 밍밍하게 사는 날이 있을 거고 또 다른 일로 훅- 감정의 쓰나미가 날 때려재낄 수도 있고 그러면 이것저것 많은 것들이 섞여서 그에 대한 그리움은 다른 그리움과 섞인 모호한 감정으로 찾아오거나 점점 그런 횟수가 줄어들겠지? 그럼 결국 괜찮아지는 걸까?


아, 그것도 있다. 요 며칠 내가 좋아하는 배우 선배님과 자주 만나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긍정성이 그 파장이 내게로까지 넘어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녀는 정말 놀랍다!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면 깨닫는 것이 부정적인 것을 생각 안하려고 노력하는 느낌이 아니라, 애초에 긍정성에 포커스가 있다.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다르다. 사람들은 긍정을 "물이 반이나 남았네?"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니다. 정말 긍정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모른다. 내가 옆에서 지켜본 그들의 생각 회로는 이렇다.


"(물잔을 들며)어머, 이 유리잔 너무 예쁘다~~ 어머 이거 나 먹어도 돼요? 물 맛 좋다~"


뭔 말인지 알겠지? 물이 반만 들었는지 반이나 들었는지에 관심이 없다. 천진하게 주어진 물잔과 그 잔에 든 물을 즐기기 바쁘다. 억지로 애쓰는 게 아니라, 정말 물의 총량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는 느낌!


7년전쯤 내 인생에 퐁당퐁당 밍밍하고 슴슴한 관심을 꾸준하게 보이던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를 어제 영화 시사회 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내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처음엔 '네가 왜 여기있어?'하는 마음이 들며, 눈이 똥그래졌지만 순식간에 피식 웃음이 나더라. 그렇게 눈인사 정도만 하고 극장을 나섰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선배님 따라 뒷풀이 자리까지 참석했다가 자정이 넘어서 집에 갔다. 택시 타고 집에가는 길, 그가 전화가 왔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대화를 나눴는데 기억에 남는 지점은 내가 생각하는 그와 그가 생각하는 내가,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좀 달랐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잘해준 여자라고 기억했다. 그 말을 듣는 즉시, '난 해준 게 없는데~?' 라는 생각이 스쳤고 '무엇을 내가 잘해줬다고 생각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딱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내 기억 속에 7년 전 그와 나는 서로 전혀 뜨겁지 않았다. 밍밍한 관심에 나 역시 적당히 밍밍하게 그를 대했고 적당히 놀다가 적당한 순간에 흐지부지 된 걸로 기억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의 날들을 떠올리다보니 '같은 시간을 나눴지만 서로 다른 기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이어서 같이 보낸 한시절이 지나고, 한참 뒤 그 시절에 대한 상대의 해석은 타인에게 묻지 않고 예측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다싶다. 과거는 현재에 의해 매번 재해석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제처럼 예전에 친했던 사람을 우연히 다시 만나면 '함께 나눈 시간에 대한 타인의 해석을 들을 기회가 생기는구나~' 알게 된다. 이어서 '오랜시간이 지나고 나서 난 지금의 감정들을 어떻게 기억할까나~' '시간이 흘러 지금 내가 쓴 글을 읽으면 또 어떤 기분이 들까?' 요리조리 자문해 보게되었고, 그러고나니 마음이 좀 말캉말캉 재밌어졌다. 내 자문들에 자답도 해본다. '아마 그래도 내게 치명적이었던 한 시절로는 기억하겠지?' '그것도 아니려나?' 나홀로 멍하니 앉아 이런저런 자문자답을 내 스스로에게 요리조리 해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이순간의 감정을 너무 확정지으려할 필요도 없겠다고.^^ 어제 이후로 확실히 감정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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