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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사랑

관계의 죽음, 그 애도일기 06

by 심심

어제는 보령에 다녀왔다. 보령은 나의 명리학 선생님이 계신 곳이다. 환갑이 넘으신 선생님을 만나고 올 때면 매번 지혜를 얻어온다. 어제는 함께 간 지인 사주를 풀이 해주시는 과정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좋은 운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할 것은 호사다마好事多魔. 여기서 호사, 좋은일 이전에 신(세상은) 다마, 나쁜 일을 먼저 준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데 그 때 시험에 넘어가면 안 되고, 도리대로 생긴대로 그 위기를 이겨내는 사람에게만 결국 호사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지인에게 좋은 일 이전에 어떤 시험이 닥칠 수 있을 지에 대해 글자를 풀어주셨고, 내게도 혹여 지인에게 지혜를 나눠줄(사주를 봐줄) 기회가 생긴다면 꼭 호사만 읊어줄 것이 아니라 다마를 함께 언급해야함을 일러주셨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다는 것. 명리학과 주역 공부를 조금씩 해내가는 중이기에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나는 관계에 대한 애도일기를 쓰고 있지만, 실은 직업인으로서 나는 지금 중요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몇년 간 쓰던 시나리오를 최근 마무리했고, 다른 작업들을 추진하면서 좋은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 기를 모으는 시기. 어쩌면 관계에 있어 휘청대는 게 내게 주는 시험은 아닐까? 왜냐하면 요근래 나는 일에 관해서는 쉬이 휘청거리지 않는다. 어떤 상황이 와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에 다년간 훈련이 되면서 일거리가 와준다는 것, 그 자체가 그저 감사한 상태에 대부분 머물러 있다. 따라서 평정심을 잘 지키는 영역을 벗어나 내가 지금까지 겪어본적 없는, 단련되지 않은 영역. 즉, 관계에 있어 시련을 주심으로서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걸까?ㅎㅎ


이런 상상을 해보고 나면 영웅의 Journey의 주인공이 된 기분도 들며 썩 기분이 말랑말랑 재밌어지지.


지인의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살짝 잠이들었다. 실은 나를 자꾸 재우려는 지인의 요청에 맞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렇게 했다. 몇분이 흘렀을즈음 지인은 음악을 끄고, 평소 자신이 즐겨 듣는 유튜브 콘텐츠를 켰다. 1분 과학 유튜버가 패널로 나오는 콘텐츠였는데 '깨달음'에 대한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지는 해를 따사롭게 맞으며 자는둥 듣는둥 하며 반수면 상태로 차에 실려 두둥실~ 기분좋게 서울에 도착했다.


동행자와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 아까 유튜브가 떠올라 다시 검색해서 들어봤다. 거기서 패널은 말했다.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랑이라고. 엄마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랑과 편견없는 시선.


엄마가 아이를 사랑할 때의 뇌 상태와 깨달음에 달한 인간의 뇌상태가 거의 일치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상태냐? 깨달음 상태의 뇌 사진을 보면 그건 바로 뇌에서 '나'를 지각하는 영역의 신호가 꺼진 상태.


5년 전부터 나는 명상을 시작했고, 회사다니던 시절 내 닉네임은 '무아'였을만큼 깨달음에 관심이 많기에, 일정부분 아는 내용이었음에도 뇌과학과 뇌사진으로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으니 새로웠다. 유튜브 콘텐츠로 다시금 이와같은 진리를 마주했을 때, 머리가 번쩍- 쫙- 반짝! 하는 기분이었다. 반짝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말그대로 내 몸의 기의 흐름이 분배가 잘 되고 순환이 잘되기 시작하는 느낌!


맞다. 깨달음은 사랑이다. 나는 이따금씩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면서 내 개인적인 욕망으로 글을 쓰면 안된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영감은 내 것이 아니고, 온 우주의 것을 내 손을 빌리는 것 뿐이라고. 그렇기에 내 손을 빌려 나오는 이야기가 세상에서 어떤 생명체가 될지, 어떤 에너지가 되었으면 좋겠는가? 에고가 있는 나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거기서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다정한 마음을 항시 품어야한다고, 불순한 마음을 먹으면 안된다고 뒷산을 자주 걸으며 다스린다. 도를 닦듯 글을 쓰는 내마음을 끊임없이 다스린다. 글쓰기는 종종 수행 같다고 생각하며.


반면 관계에 있어서는 그 발상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내가 그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상대의 상태의 변화, 감정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게 사랑일까? 사랑이라기보단 집착아닐까? 그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도 아닐 것이다. 그와 내가 그 때 함께 만들어낼 수 있었던 유일했고, 강렬했던 순간들에 대한 경외. 감동. 그것에서 비롯된 집착. 그가 함께 나눠준 매력적인 시간에 잠시나마 메여있었던 나를 반추해본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 스스로가 가엾게 느껴진다. 내 마음을 토닥이고 알아주고 싶어졌다.


'너가 그랬구나~ 너무 귀하고 소중했구나. 그 시간들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너도 알고 있지?ㅎㅎ 가지려고 하지않을 때, 모든 걸 가질 수 있고 가지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임을 너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 많이 경험하고 알아왔잖아. 그리고 너가 과거에 나눴던 강렬한 그 시간은 이미 너의 것이야. 순간은 부여잡을 수 없는 것. 너의 애틋한 마음은 내가 알아줄테니 그저 그 강렬한 순간이, 그에 따른 네 감정이 네 몸 속에서 또 새로운 작업을 통해 적절한 쓰임이 있는 곳을 만날 수 있도록 그 응어리를 놓아주자꾸나. 너의 감정에너지가 내 몸 속 세상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도록, 꼭 맞는 제 자리를 찾아 또 새생명으로 탄생할 수 있도록 이젠 풀어주자꾸나.'


^^


역시 글쓰기는 치유에 도움이 된다. 오늘은 보다 사랑을 방사하는 에너지로 존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샘솟는다.


사랑해. 나도 또 당신도.

미안해. 내게도 또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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